- 장애인권리보장법·청년 대표성·국제연대를 국내 변화로
- AI·돌봄·폭력·국제협력까지… 새로운 20년 로드맵 수립해야
[더인디고] 제19차 당사국회의(COSP19)는 새로운 선언이나 약속을 만드는 자리가 아니었다. 지난 20년 동안 만들어진 권리와 간극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의 20년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이끌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 자리였다.
결산 1편에서 살펴본 국제사회의 흐름은 한 마디로 ‘새로운 선언보다 이행’이었다. 2편에서는 한국 장애계가 AI와 디지털 전환, 민주주의와 대표성, 탈시설과 자립생활 등 다양한 의제를 국제사회에 제안하며 글로벌 리더십을 확장한 성과 등을 조명했다.
남은 질문은 하나다. 유엔에서 확인한 성과와 국제연대를 어떻게 한국 사회의 변화로 연결할 것인가이다.
■ “약속과 현실의 간극 메워야”
나와프 카브라(Nawaf Kabbara) 국제장애인연합((IDA) 회장은 장애인권 운동이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전쟁과 무력분쟁, 기후위기, 국제개발협력 재원 감소, 인공지능(AI)과 신기술 확산이 장애인을 다시 주변부로 밀어낼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며 “인권은 어려운 시기에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많은 국가가 CRPD를 비준했음에도 교육과 고용, 정치 참여, 사법 접근 등에서 여전히 높은 장벽이 존재한다”며, “AI 역시 장애인의 실질적 참여 없이 설계된다면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결국 앞으로의 20년은 새로운 권리를 선언하는 시대가 아니라, 이미 약속한 권리를 실제 삶 속에서 구현하는 ‘이행의 시대’라는 것이 국제사회의 공통된 문제의식이었다.
이 같은 흐름은 한국 참가단에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사국회의에 참가한 김영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팀장은 “협약 조문을 논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권리를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전제한 뒤, “이동권과 자립생활, 탈시설, 디지털 접근성, AI 등 한국이 직면한 과제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공통 의제로 논의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국제사회의 경험과 연대가 앞으로의 정책 제안과 권리옹호 활동에 큰 힘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 장애인권리보장법, 지금부터 2년이 승부처
한국 사회가 가장 먼저 답해야 할 과제는 올해 제정된 장애인권리보장법의 실질적인 이행이다.
법 제정은 복지 중심에서 권리 중심으로 장애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역사적 의미를 갖지만, 시행령과 장애인복지법 전면개정, 예산 및 행정체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선언적 성과에 머물 가능성도 적지 않다.
향후 1~2년은 시행 준비의 골든타임이다. 파편화된 권리구제 체계와 지역사회 지원체계, 개인별지원계획 등의 핵심 제도를 권리 중심의 틀 안에서 촘촘히, 제대로 구축해야 실효적일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설계 과정에서 당사자를 비롯한 장애인단체들의 참여가 중요하다는 것이 이번 당사국회의 내내 강조됐다.
또한 유엔 현지에서 국회의원들과 장애인단체 관계자의 간담회에서도 장애인권리보장법 후속 입법과 시행령 마련은 핵심 의제로 논의됐다. 정부 주도가 아닌 최소한 단체들과의 TF 구성 등을 통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당시 참가자들은 CRPD 원칙을 충실히 반영한 후속 법제 정비의 필요성을 공유하고, 지속적인 협의를 이어가기로 뜻을 모았다. 결국 권리보장법의 성패는 국회 통과가 아니라 앞으로의 이행 과정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 청년 대표성과 국제연대
당사국회의에서 확인된 또 다른 변화는 청년 세대의 부상이라는 점 역시 앞서서도 강조한 바 있다.
CRPD가 채택되고 이행되는 과정에서 성장한 청년 장애인과 활동가들은 더 이상 국제회의의 지원 인력이 아니라 정책을 제안하고 국제사회를 설득하는 주체로 등장했다. 시민사회포럼에서는 여러 국가의 장애청년 네트워크가 정치 참여와 대표성, 공동 의사결정을 핵심 의제로 제시했고, 한국의 청년 활동가들 역시 토론과 국제 교류에 적극 참여하면서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단순한 세대교체가 아니라 장애운동의 리더십 전환을 보여주는 흐름으로 평가된다.
또한 청년뿐 아니라 여성장애인, 발달장애인, 정신·사회적 장애인 등 다양한 당사자의 대표성을 확대하고, 실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우리 없이 우리에 관한 것은 없다(Nothing About Us Without Us)”는 CRPD의 원칙은 선언이 아니라 정책 설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국제회의에서 형성된 네트워크를 일회성 교류에 그치지 않고 정책 협력과 공동 연구, 활동가 교육과 연수, 아시아·태평양 지역 교류로 연결하는 장기 전략도 필요하다. 국내와 아태지역 활동가들의 국제 역량을 체계적으로 키우는 투자는 향후 장애운동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할 핵심 기반이 될 수 있다.
■ 국제연대를 국내 변화로
국제사회가 더 이상 거대한 담론만 논의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줬다.
AI와 디지털 전환, 기후위기, 국제개발협력 축소와 같은 새로운 글로벌 의제와 함께 돌봄, 폭력, 온라인 공간에서의 혐오와 알고리즘 차별, 지역사회에서 반복되는 학대와 배제 등 일상 속 인권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이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권익옹호기관이 존재함에도 많은 학대 사건이 신고 이후에야 드러나고, 온라인과 AI 환경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차별이 등장하고 있다. 앞으로의 장애운동은 권리 담론과 예산 확보를 위한 노력은 물론, 지역사회와 자립생활(IL) 운동을 기반으로 일상 속 차별과 폭력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다층적 전략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국제회의의 성과를 국내 이행으로 연결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중장기 로드맵도 요구된다.
정부와 국회는 장애인권리보장법 시행과 후속 법제 정비를 책임 있게 추진하고, 지자체와 의회는 지역사회 권리옹호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시민사회 역시 청년 리더십을 키우고 국제협력, 특히 장애포괄 국제개발협력(ODA)이나 정책 교류를 확대하며 글로벌 의제를 국내 정책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CRPD 20주년이 한국 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앞으로의 20년은 새로운 권리를 선언하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약속한 권리를 장애인의 삶 속에서 실현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이번 당사국회의는 한국 장애계가 국제회의의 참석자를 넘어 의제를 제안하고 협력을 설계하는 주체로 성장했음을 보여줬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발성 성과가 아니라 국가와 장애계가 함께 마련하는 ‘CRPD 이후 20년 로드맵’이다. 국제사회에서 확인한 의제를 한국의 법과 제도, 예산, 지역사회 실천으로 연결할 때 비로소 이번 당사국회의 의미도 완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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