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실명한 지 2년쯤 지난 어느 날의 기억이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왔는데 갑자기 빗줄기가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가 궁금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나도 내 눈으로 10년 넘게 수백 번 본 장면이었을 텐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이 그린 수채화 그림처럼 일자로 내려오는 물줄기가 보였는지, 투명한 물이 내려오는 거라 눈으로는 잘 구별할 수 없었는지, 숱하게 봤던 장면인데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나서 어느 정도 궁금증이 해결되긴 했지만, 스스로 그것을 확인해 볼 수 없다는 것이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답답함으로 다가왔다. 한동안 비 오는 날마다 멍하니 빗소리를 들으며 괴로운 마음을 삭여야 했다. 그 무렵엔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을 괜스레 들고 들여다보기도 하고, 무작정 보이는 척 길을 걸어보기도 했다.
몇 년 동안이나 보이지 않던 눈이 전래동화나 성경의 어느 장면처럼 ‘짠!’ 하고 시력을 회복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없는 것에 가까웠지만, 답답함의 극단을 경험하고 있는 이에게 그런 합리적인 판단 능력은 없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꽤 힘든 시간을 안간힘을 다해 견디고 있었다.
다행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장애를 온전함에 가깝게 받아들이게 될 때쯤 나를 둘러싼 해결되지 않는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고백하건대 그것은 나의 특별한 노력이나 의지로 된 것은 아니다. 비결을 묻는 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냥 견디고 버틴 것 이외에 그 끝을 만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힘들고 답답한 날들이었지만 일상을 살아냈고, 하루를 보낸 날들이 합해졌다. 종교적인 의지와 긍정적인 사고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모든 것을 포함하더라도 내게 평정심을 되돌려준 일등 공신은 존엄한 버티기의 시간이었다. 심한 감기에 걸렸을 때 약의 도움은 받을 수 있지만 결국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회복할 수 없는 것처럼, 실명을 상실이 아닌 변화로 받아들이기까지는 굉장히 오래 견뎌내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의 나에게 실명이라는 사건은 별것 아닌 작은 에피소드이거나 때때로 나를 변화시킨 긍정적인 전환점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은 긴 견딤의 시간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살고 있는 대부분의 시간은 기다리고 버텨내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요약하면 기뻤고 보람되었고 감사했지만, 그 모든 것은 평범하거나 힘든 시간을 보냈기에 가능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의 서사가 그러하듯 클라이맥스의 순간들만이 강렬하게 기억되지만, 그 장면을 짜릿하게 강조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몇 배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거대한 악당을 물리치는 것도, 꿈꿔왔던 성공을 마주하기까지도, 그 짜릿함에 앞서는 힘들거나 지루하거나 불안한 스토리는 필수적이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수년간의 시간이 그랬을 것이고, 천만 영화의 주인공이 된 배우의 무명 시절도 그랬을 것이다.
요즘 하루하루 반복되는 힘든 시간을 하소연하듯 말하는 동료들과의 대화할 때가 많다. 사실 같은 하늘 아래 사는 나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의 삶이 큰 의미를 만들어 가는 견딤의 과정임을 믿고 있다.
꼬물거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아기는 어느 틈에 뛰는 법을 익혔고, 제법 필요한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안아주고 토닥여주고 재워주고 달래주는 시간은 끝이 없을 것 같지만, 그 모든 시간은 아이의 클라이맥스를 만들기 위한 긴 과정임이 분명하다.
오늘도 오래전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렸고 내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지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운치를 즐기며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오늘의 나에게도 쉽게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문제들이 가득하지만, 막연한 믿음과 우직한 견딤의 힘을 믿으며 또 하루를 웃으며 보낸다.
[더인디고 THE INDG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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