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인디고=이민호 집필위원] 며칠 전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특별한 것을 사려던 것은 아니었다. 계란과 우유, 채소, 과일처럼 식탁에 늘 오르는 평범한 식재료를 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매대를 둘러보며 여러 번 가격표를 확인해야 했다. 계란 한 판도, 우유 한 통도, 상추 한 봉지도 예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장바구니에 담을 수 없었다. 하나를 집으면 다른 하나를 내려놓아야 했고, 계산기를 두드려 본 뒤에야 겨우 장바구니를 채울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은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다. 먹거리 물가 상승은 일상이 되어 버렸다. 기후위기로 인한 폭염과 집중호우, 가뭄이 반복되면서 농산물 생산은 불안정해졌고, 국제 원자재 가격과 물류비, 인건비 상승까지 겹치면서 식품 가격은 계속 오르고 있다. 하지만 같은 물가 상승이라도 모두에게 같은 무게로 느껴지지 않는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은 가격이 조금 올라도 필요한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소득이 낮은 사람들에게 식품 가격 상승은 소비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대비 2024년 소득 하위 20% 가구의 월평균 식비는 31만 3천 원에서 43만 4천 원으로 약 39% 증가했다. 이는 전체 가구 평균 증가율인 26.3%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같은 물가 상승이라도 저소득층이 체감하는 부담은 훨씬 크다. 소득은 크게 늘지 않았는데 식비만 빠르게 오르면 다른 지출을 줄이거나 결국 먹거리의 질을 낮출 수밖에 없다. 한정된 생활비 안에서 가장 먼저 줄이는 것은 채소와 과일, 우유와 육류 같은 영양가 높은 식품이다. 대신 가격이 저렴한 가공식품과 인스턴트 식품이 식탁을 대신한다.
밥상은 한 사회의 소득 격차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소득 하위 25% 가구와 상위 25% 가구의 식품 소비를 비교한 결과, 곡류 소비량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소득 하위 가구의 곡류 소비량은 상위 가구의 99.2% 수준이었다. 그러나 우유 소비량은 65%, 과일은 74%에 그쳤고, 육류와 어패류도 각각 86%, 79% 수준에 머물렀다. 이는 단순히 좋아하는 음식을 덜 먹는다는 뜻이 아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하는 식품부터 포기하게 된다는 의미다. 소득 격차가 식탁의 질을 결정하고, 식탁의 질은 다시 건강의 격차를 만든다. 부족한 생활비를 줄이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식탁에서 사라지는 것은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하는 식품들이었다. 배를 채우는 것은 가능하지만 건강을 지키는 식사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처럼 영양가 높은 식품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는 생활이 계속되면 그 영향은 몸에 그대로 나타난다. 식탁의 불평등은 결국 건강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질병관리청 조사에 따르면 중위소득 50% 이하 가구의 비타민 A 섭취량은 권장량의 50%, 비타민 C는 54%에 불과했다. 칼슘은 권장량의 60% 수준이었고 비타민 B3도 충분히 섭취하지 못했다. 그 결과 중위소득 50% 이하 가구의 당뇨병 유병률은 37%로 전체 평균인 23%보다 약 1.5배 높게 나타났다. 물론 질병은 생활습관과 유전, 환경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해 발생한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건강한 식사를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이 만성질환의 위험을 높인다는 사실은 다양한 연구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결국 값싼 음식은 당장의 허기를 달래지만 건강을 지키지는 못한다. 건강한 식사를 포기한 대가는 영양 부족과 만성질환으로 돌아오고, 늘어난 의료비는 다시 가계에 부담을 안긴다. 가난 때문에 건강한 음식을 포기하고, 건강을 잃어 더 가난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악순환은 모두에게 같은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같은 빈곤이라도 누군가는 더 많은 비용을 감당해야 하고, 더 큰 제약 속에서 살아간다. 그 현실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집단 가운데 하나가 장애인이다.
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빈곤율이 높고, 의료비와 보조기기 구입비, 활동지원과 이동에 필요한 비용 등 장애로 인해 발생하는 추가 지출을 함께 감당해야 한다. 이동이 어려운 장애인은 가격이 저렴한 대형마트나 전통시장을 자유롭게 이용하기 어렵고, 온라인 주문이나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배송비와 배달비를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기후위기는 이러한 불평등을 더욱 깊게 만든다. 같은 폭염과 폭우, 같은 물가 상승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잠시 불편한 일일 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끼니의 질을 떨어뜨리고 건강을 무너뜨리는 생존의 문제가 된다. 장애인을 비롯한 취약계층은 기후위기의 충격을 흡수할 여력이 훨씬 적다. 그래서 기후위기는 환경 문제만이 아니다. 건강의 문제이며 복지의 문제이고, 결국 인권의 문제다.
기후위기 시대일수록 사회는 건강한 먹거리에 접근할 권리를 더욱 적극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저소득층과 장애인을 위한 식품 지원을 확대하고, 지역사회 먹거리 안전망을 촘촘하게 구축해야 한다. 공공급식과 돌봄 체계 역시 장애인의 현실을 반영해 다시 설계할 필요가 있다. 기후정책도 탄소 배출을 줄이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가장 먼저, 가장 크게 피해를 받는 사람들의 건강과 삶을 지키는 복지정책이어야 한다.
건강한 식사는 개인의 의지나 절약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 문제다. 누구나 경제적 형편 때문에 과일과 우유, 채소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장애인이 장애와 빈곤 때문에 건강까지 잃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복지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다. 기후위기 시대일수록 사회는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식탁부터 지켜야 한다. 그래야 ‘가난해서 아프고, 아파서 가난한’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건강은 시장에서 돈으로 사고파는 상품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기본권이다. 누구의 식탁도 가난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건강권이며 인간다운 삶의 최소한의 존엄이다. 그리고 그 존엄을 지키는 일은 개인의 몫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반드시 책임져야 할 과제이다.
참고자료
질병관리청(2021), 「우리 국민의 식생활 현황」(2020년 국민건강영양조사 기반)
매일경제, 2022. 7. 19. “생선·과일은 사치”…고물가에 저소득층 영양결핍도 대물림
매일일보, 2025. 3. 2. “100원 벌어 50원은 식비”…‘먹고 사는 문제’가 곧 생존 문제로
한국경제, 2025. 10. 24. “아침마다 사과 챙겨 먹었는데…마트 갔다가 놀란 이유”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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