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호의 차별 속으로] 잘못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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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는 한 남성이 "장애인에게 이동권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하고, 오른쪽에는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여성이 "질문하신 분은 버스, 기차, 비행기, 선박, 케이블카를 탈 때마다 그 이유를 증명하십니까?"라고 되묻는다. 상단에는 버스, 기차, 비행기, 선박, 케이블카 등 다양한 이동수단이 아이콘 형태로 표현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이동은 삶 그 자체입니다."라는 문구가 배치되어 있다. 하단에는 '이동권은 기본권입니다', '이동이 막히면 삶도 막힙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라는 세 가지 핵심 문구와 함께 관련 아이콘이 배치되어 있다. 가장 아래에는 "왜 아직도 누군가는 이동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가?"라는 문장이 삽화의 마무리 문구로 제시되어 있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잘못된 질문‘ /이미지=ChatGPT
이민호 집필위원
▲이민호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이민호 집필위원] 운 좋게도 40대가 되어서야 통영을 찾았다. 수많은 예술가가 사랑하고, 또 그들을 품어온 도시라 하여 오래전부터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다 보면 아기자기한 마을과 푸른 바다가 번갈아 모습을 드러낸다. 고지대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오르면 풍경은 한층 입체감을 더하고, 잔잔한 바다는 햇살과 달빛마저 부드러운 윤슬로 품어낸다. 풍족하게 음식을 내어주는 다찌집의 인심, 병어 무침회의 부드러운 식감, 강구안의 야경, 그리고 여행의 마침표를 찍는 꿀빵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오래도록 즐거운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왜 예술가들이 통영을 사랑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앞으로 누군가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라고 부른다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다. 이제는 나폴리를 ‘서양의 통영’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낯선 풍경을 만나고 다른 삶의 방식을 경험하며 이전보다 조금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통영에서의 여행이 내 시야를 조금 넓혀 주었다면, 인류 역시 오랜 세월 이동을 통해 서로의 세계를 넓혀 왔다.

낯선 땅으로 향한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를 만나 서로의 삶을 배우며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바닷길을 오간 상인도,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난 사람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예술가와 사상가도 모두 이동을 통해 세계를 넓혔다.

바퀴의 발명에서 길의 확장, 실크로드와 대항해 시대, 철도와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이동을 통해 언어와 기술, 문화와 사상을 나누었다. 이동은 단순히 장소를 바꾸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을 배우고, 사람과 연결되며, 자신의 삶을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이동은 문명을 발전시킨 힘이었고,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게 한 가장 기본적인 자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세월 인류의 발전을 이끌어 온 이동이, 정작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당연한 권리로 보장되지 않는다. 법과 제도는 이동권을 인정한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저상버스가 오지 않아 버스를 포기해야 하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멀리 있는 길을 돌아가야 한다. 기차나 비행기를 이용하기 위해 사전 신청과 별도의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 이동수단과 시설은 여전히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고, 장애인은 자신의 의지보다 타인의 도움에 따라 이동권 보장 여부가 결정되는 현실을 마주한다. 권리라면 누구나 필요할 때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어야 하지만, 장애인의 이동은 여전히 조건과 허락, 그리고 운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장애인에게 이동은 여행이나 취미를 위한 선택이 아니다. 학교에 가고, 일터로 향하고, 병원을 찾고, 가족과 친구를 만나며, 문화와 여가를 누리는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출발점이다. 이동이 막히는 순간 교육권과 노동권, 문화향유권,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까지 함께 제한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이동권을 기본권이 아니라 특별한 배려나 복지 혜택으로 여긴다. 이동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장애인에게만은 허락을 받아야 하는 예외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동은 이유를 증명해야 얻을 수 있는 혜택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다.

얼마 전 누군가 내게 물었다.

“장애인에게 이동권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질문을 듣는 순간 생각했다.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래서 나는 되물었다.

“질문하신 분께서는 버스나 기차, 비행기, 선박, 케이블카, 택시를 탈 때마다 그 이유를 증명하십니까?”

우리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서고, 바다를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며,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차를 탄다.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바람을 쐬러 나가기도 한다. 이동은 수단이 아니라 삶 그 자체다. 그래서 ‘왜 이동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은 ‘왜 숨을 쉬려 하는가?’를 묻는 것만큼이나 공허하다.

통영 바다를 바라보며 다시 생각했다.

이 땅의 모든 곳은 누구에게나 열려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길과 버스, 지하철, 여객선과 관광지 또한 마찬가지다. 누구도 이동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누구도 계단 앞에서 여행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야 할 문명이다.

이동하지 못하는 삶은 단순히 불편한 삶이 아니다. 사회와 단절되고 관계가 끊기며 교육과 노동, 문화와 여가의 기회를 빼앗기는 삶이다. 이동권의 부재는 결국 특정한 사람들을 문명 밖으로 밀어내는 일이다.

이동권이 왜 필요한지를 묻는 사회는 여전히 이동을 권리가 아니라 혜택으로 바라보는 사회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이동권이 필요한가?’가 아니라 ‘왜 아직도 누군가는 이동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가?’이다.

잘못된 질문은 잘못된 답을 낳는다. 장애인에게 이동의 이유를 설명하라고 요구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사람을 다른 시민과 동등한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예외적인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한 사회의 문명 수준은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멀리 이동할 수 있는가로 결정되지 않는다. 누구도 이동의 이유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누구도 계단 앞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었는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문명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더인디고 THE INDIGO]

대구 지역 다릿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권익옹호 팀장으로 활동하는 장애인 당사자입니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장애 인권 이슈를 ‘더인디고’를 통해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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