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RPD 20년, 장애포괄적 국제개발협력의 다음 20년
2026년은 UN장애인권리협약이 발효된 지 2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해 지난 9월 1일부터 2일까지 열린 ‘2026 국제장애인권컨퍼런스’에서는 장애인의 권리를 국제개발협력의 전 과정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다양한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더인디고는 컨퍼런스 공동 주최기관 활동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현장과 고민을 세 편의 기고로 전합니다. 공식적인 발표 내용뿐 아니라 현장에서 오간 질문과 생각, 그리고 장애포괄적 국제개발협력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생생한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 편집자 주
l 이리나 한국장애인재활협회 대외전략국장
권리를 ‘국경 너머’에서 묻다
지난 9월 1일과 2일에 열린 2026 국제장애인권컨퍼런스의 주제는 ‘CRPD 20주년: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국제개발협력’이었다. 1일차가 유엔장애인권리협약(CRPD)이 지난 20년간 만들어온 변화와 남은 과제를 돌아보는 자리였다면, 2일차는 그 권리를 국경 너머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묻는 시간이었다.
오전에는 KOICA 개발협력연대(DAK) 장애분과 소속 단체들이 지난 6월 뉴욕에서 열린 제19차 유엔장애인권리협약 당사국회의(COSP19)의 활동과 성과를 나눴다. 장애와 민주주의, 탈시설, 장애여성의 교차차별, 통합돌봄, 디지털 전환과 AI까지 주제는 달랐지만, 질문은 하나로 모였다. 장애인은 국제개발협력의 ‘대상’인가, 아니면 변화를 함께 만드는 ‘주체’인가.
특히 디지털 전환과 AI에 관한 논의는 이 질문을 선명하게 보여줬다. 디지털 기술은 장애인의 정보 접근, 교육과 고용의 기회를 넓힐 수 있다. 반면 장애인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은 기존의 편견과 차별을 더 빠르고 넓게 재생산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 질문은 ‘장애인이 AI를 사용할 수 있는가’에서 멈출 수 없다. ‘AI는 장애인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 ‘기술을 설계하고 평가하는 과정에 장애인이 참여하고 있는가’까지 물어야 한다. 장애인은 기술의 이용자에 머물지 않고 공동창작자이자 의사결정자가 되어야 한다.
‘Nothing about us’에서 ‘Nothing without us’로
오후에는 네팔, 방글라데시, 라오스와 장애분과 회원단체들이 개발협력 현장의 경험을 공유했다. 정치 참여, 재활서비스, 권리옹호, 탈시설과 지역사회 포용 등 분야는 달랐지만, 현장의 메시지는 오히려 단순했다. 장애포괄은 ‘장애인만을 위한 별도의 사업’을 하나 더 만드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역주민을 위한 보건·교육·소득증대 사업이라면 장애인 역시 그 지역의 주민이다. 기초선 조사에서 장애인을 빠뜨리지 않고, 사업 대상과 수혜자에 포함하며, 교육과 주민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보장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된다. 결국 장애포괄은 사업계획서에 별도의 한 꼭지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 단계부터 “이 사업에서 장애인이 빠져 있지는 않은가”라고 묻는 태도다.

이날 가장 오래 남은 말은 방글라데시의 장애인권 변호사 레잘 시디키의 “Nothing without us”였다. 익숙한 “Nothing about us without us”에서 ‘about us’를 덜어낸 표현이다. “우리와 관련된 일은 우리 없이 결정하지 말라”를 넘어, “우리 없이 해도 되는 사회의 일이 따로 있는가를 되묻는 말”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교육과 보건, 고용, 디지털 전환, 사회보장, 기후변화, 국제개발협력은 모두 장애인의 삶과 연결된다. 장애가 사업의 제목에 들어 있지 않더라도 장애인을 빠뜨리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장애포괄이고 장애주류화다.
회의장 밖에서 보인 다음 과제
공식 프로그램이 끝난 뒤 해외 참가자들과 나눈 대화에서도 의미 있는 제안이 나왔다. 일회성 컨퍼런스가 아니라 아시아·태평양의 장애인단체들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플랫폼을 만들고, 지역사회 자립생활·재활서비스·정치 참여 등 구체적인 의제를 중심으로 공동 ODA 사업을 기획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국내 장애계의 기반도 함께 넓어져야 한다. 하지만 국제적 연대와 협력을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재원과 구조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장애포괄적 개발협력사업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번 컨퍼런스처럼 다양한 국가와 분야의 현실과 경험을 함께 논의하는 테이블이 있어야 하고, 그 속에서 각국 장애인이 실제로 마주하고 있는 문제와 필요한 변화를 확인할 때 비로소 인권에 기반한 개발협력사업을 설계할 수 있다.
따라서 국제장애인권의 경험을 나누고 이를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가기 위한 재원 역시 특정 부처만의 몫으로 볼 수 없다. 개발협력기관은 물론 다양한 공익기관과 민간의 자원까지 함께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장애계가 국제적 의제를 논의하고, 그 논의를 공동사업으로 발전시키며, 다시 현장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지속가능한 장애포괄적 국제협력의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다음 20년, 경험을 나누는 데서 함께 만드는 데로
CRPD가 만든 지난 20년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장애인의 삶을 ‘복지’가 아니라 ‘권리’의 언어로 바라보게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생존, 교육, 보건, 고용, 정치적 참여와 같은 기본적인 권리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있다.
컨퍼런스를 마무리하며 한국장애인재활협회 조성민 사무총장은 지난 20년간 CRPD의 국내 이행에 집중해 온 한국 장애계가 이제는 개발도상국과 권리 이행의 경험과 힘을 나누는 장애포괄적 국제협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국내의 다양한 원조·개발지원 기관들과 장애 관점을 연결하는 일도 그 출발점이다.
지난 20년이 권리를 확인하고 제도화하는 시간이었다면, 다음 20년은 그 권리를 국경 너머에서 함께 실천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필요한 것은 선언을 하나 더 보태는 일이 아니다.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함께 기획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실행하는 것. ‘Nothing without us’는 다음 20년의 국제개발협력이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를 가장 짧고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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