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내 마음 최고의 특수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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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폰 연주 ©픽사베이
▲색소폰 연주 ©픽사베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처음 특수학교에 입학하던 날은 내게 좋지 않은 기억들로 채워져 있다. 일반 학교의 몇분의 1밖에 안 되는 좁은 교실들, 줄줄이 기차놀이를 하면서 다니는 아이들, 읽기도 힘든 점자책 더미들, 여기저기 부딪히고 헤매던 장면들은 나의 장애를 강제적이지만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주홍글씨 낙인식의 과정이라 여겨졌다.

아직 눈의 치료와 시력의 회복을 바라던 내게 더 이상 그런 희망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듯한 순간들 속에서 난 다시 오를 수 없는 깊은 구덩이로 점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포기와 좌절과 그것들에 대한 인정들로 채워진 입학식의 우울한 기억 속에서 단 한 가지 놀라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이 브라스 밴드부의 연주였다. 애국가도, 교가도, 상장이 수여될 때도, 학생들이나 교장 선생님이 입장하고 퇴장할 때도 울리던 웅장한 소리는 학생들의 실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식을 마치는 시간까지도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난 후에도 난 나와 같이 보이지 않는 우리 학교의 학생들이 그 연주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특별히 초청된 연주단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시력이 꽤 남아있는 저시력 학생들만 모아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섬세한 플롯이나 클라리넷의 소리도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트럼펫과 트롬본의 소리도 열다섯 살의 내 인생에서는 그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최고의 선율이었다. 물론 그 당시만 하더라도 난 그 소리가 어떤 악기에서 나는 소리인지 구별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 음악의 주인공들이 나와 같은 기숙사에 사는 선배들, 친구들, 후배들임을 명확히 알고 난 뒤에도 난 그들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또 다른 차원의 능력자들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때문에 내가 최영식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입학한 지 3년째가 되던 중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아주 어릴 적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조금 만져보긴 했지만, 번쩍번쩍 빛이 나는 관악기를 접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배울 악기는 색소폰으로 정해졌는데 목에 줄을 매고 버튼을 하나하나 눌러볼 때만 하더라도 내가 이 악기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 같은 것은 없었다.

난 점자악보를 유창하게 읽지도 못했고 다른 친구들처럼 소리만 듣고 계이름을 알아내는 능력 같은 것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악기는 내 최대한의 날숨에도 듣기 좋은 소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겨우겨우 입술과 혀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아낸 후에는 연주할 곡의 계이름과 악상기호들을 외우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그것을 눈 보이지 않는 내게 한 음씩 한마디씩 한 땀 한 땀 설명해 주는 것은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그때마다 놀랍게도 내 곁에 있어 주신 분이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최영식 선생님이셨다. 소리를 내지 못할 땐 입술을 만져주시고 때로는 본인의 얼굴을 만져보라고도 하셨다. 같은 부분을 틀려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시고 수십 번 수백 번을 되풀이해서 가르쳐주셨다. 좋은 소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도레미파솔라시도만 수천 번 수만 번은 불어주셨던 것 같고 내가 처음 배운 곡인 ‘반달’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루에 몇 시간씩은 꼬박 내 곁을 지켜주셨다.

학교가 끝난 시간에도 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방학마저도 음악실에서 악기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선생님께 휴일이란 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헌신 덕분으로 난 다른 세상 이야기로만 여겨지던 학교 밴드부에서 테너 색소폰 파트를 맡게 되었다.

학교 강당에서 거리 퍼레이드에서 교육청에서 국제회의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내겐 꿈과 같은 일이었지만 선생님께서는 한 명 한 명 학생들의 그 꿈을 별것 아닌 현실로 만들어 주셨다. 난 선생님 덕분에 시각장애라는 것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했고 부족해지는 것이 아니라 달라진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고 장애는 모든 부분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기회를 마주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하루하루 기적을 만들어 가시던 선생님은 어떤 찬사와 상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거인이셨지만 자신을 높이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으셨다. 지휘라고 하는 것도 겨우 작은 호루라기 하나로 족하셨고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 커튼 뒤에서 모습을 숨기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셨다. 연주가 끝나면 몇 푼의 수고비를 받으시는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밴드부 학생들의 짜장면과 탕수육 값으로 모두 내놓으셨다.

놀라운 것은 우리 밴드부 학생 중엔 지적장애를 동반했거나 자립생활이 어려운 친구들도 많았는데 그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매번 수십 그릇의 짜장면을 손수 비벼주시기도 하셨다. 어른이 되고 나서 알게 된 일이지만 정식 특수교사가 아니셨던 선생님은 넉넉한 월급이 있지도 않았고 책상 하나 의자 하나도 당신 것으로 받으신 것이 없었다.

선생님이 계셨던 곳은 음악실 구석의 악기실이었고 기숙사 지하의 가사실이었다. 푸짐한 식사보다는 샌드위치 몇 조각과 음료로 때우시는 것을 즐기셨는데 그마저도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나누시다 보면 넉넉히 드시지 못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88올림픽이나 일본 초청연주가 서울맹학교 밴드부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시간이 오롯이 학생들 한 명 한 명에게 쏟아진 덕분이었다. 선생님은 현악기도 관악기도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으셨고 그렇기에 밴드부의 모든 파트도 직접 지도하셨다. 언제부터 점자를 배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편곡하신 악보들을 점자로 옮기는 일 또한 누구의 도움 없이 직접 하셨다.

KBS교향악단의 단원이셨고 유명 작곡가나 가수들과도 직접 작업하던 선생님께서는 잠깐의 봉사로 시작한 맹학교 밴드부 지도를 37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오셨다. 머리 희끗희끗하신 선배님들부터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후배들까지 맹학교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스승을 꼽으라고 하면 ‘최영식’ 세 글자를 말하는 데 주저하는 이가 거의 없다.

가장 열심히 하셨지만 절대 드러내지 않으셨고 누구보다 훌륭하셨지만 낮아짐을 택하셨던 스승님이 90년 삶을 조용히 마무리하셨다. 언제나 그러셨듯 병환 중에도 가시는 길마저도 화려함보다 소박함을 택하신 선생님께 부족한 제자가 뒤늦게 사죄의 기도를 올렸다.

바쁘다는 이유로 다음을 기약하며 찾아뵙지 못했던 선생님의 제자들이 장례식장을 눈물로 채웠다. 선생님께서는 분명 “젊은 사람이 바쁜 게 좋지.” 라며 껄껄 웃으실 것을 우리 모두는 알지만 그렇기에 더 죄송하고 가슴이 아프다. 아직 부족하여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는 못난 제자이지만 마음으로나마 세상에서 가장 큰 상을 선생님의 영전에 바치고 싶다.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너무나 큰 본보기셨고 누구보다 멋진 어른이셨습니다. 선생님이 계셨기에 눈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을 볼 수 있었고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감히 그림자조차 따를 수 없는 참스승의 표상이시지만 이제라도 선생님의 발끝이라도 닮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부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실 수 있기를 마음을 다해 기도하겠습니다. 최영식 선생님 사랑합니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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