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느린 변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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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간(time for change) ⓒ픽사베이
▲변화의 시간(time for change) ⓒ픽사베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교사 된 지 20여 년쯤 되다 보니 초임 무렵 맡았던 제자들은 이제 꽤 나이가 들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리도 잡고 멋지게 사는 제자들을 보면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컸지?” 하는 말이 입 밖으로 저절로 튀어나온다.

세계적인 연주자, 수십만 구독자 채널의 유튜버, 글로벌 기업의 연구원, 교수, 박사, 치료사로 활약하는 제자들은 “넌 나보다 훨씬 낫다.”라는 말을 건네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장애를 받아들이는 것도 점자를 읽는 것도 한걸음 혼자 떼어 놓기도 어려워하던 모습들이 눈앞에 선한데 마주하는 기적을 보는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든다.

나름 제자들과도 종종 교류하고 지내는 터라 10년 만에 20년 만에 만나는 것도 아닌데 어느 틈에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인지를 생각하면 뭔가 마법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기적이나 마법이란 말은 지켜보는 내 입장이고 그들은 그동안 수백 권의 책을 보고 수천 번 시행착오를 겪고 수만 시간 연습했을 것이다. 느끼지도 못할 만큼의 느린 변화를 믿으면서 뚜벅뚜벅 하루하루를 견뎌냈을 것이 분명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큰 변화는 느리다. 건물이 지어지고 도로가 놓이는 것이 그렇고 사람이 변하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그렇다. 희망적인 것은 바로 그 느림과 오랜 시간이라는 데에 있다. 당장 큰 바위를 옮기는 일은 힘센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가능과 불가능으로 나누어질 수 있지만 긴 시간에 걸쳐서 건물을 짓는 일은 그렇지 않다.

단시간에 어딘가를 빠르게 찾아가는 경쟁을 한다면 난 시력 멀쩡한 사람들을 이길 수 없겠지만 5년, 10년 꾸준히 어딘가로 가는 것이 미션이라면 나 아닌 누구도 매일을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릴 수는 없을 것이고 지팡이로 뚜벅뚜벅 꾸준히 걷는 일이야 내게도 가능한 일이다.

악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시각장애인 연주자에게 처음엔 굉장한 불편함일 수 있었겠으나 긴 시간의 꾸준한 연습은 그 나름의 방법을 만들어내고 그의 실력을 최고의 경지로 올려놓는 결과가 되었다. 교재가 없고 학습의 환경이 열악한 것도 당장 보이는 문제일 뿐 시각장애인이 박사학위를 받는 데에 걸리는 지난한 시간 속에서는 다른 이의 힘든 상황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문제가 되었다.

우리가 가진 다름은 순간의 판단으로 우열이 나뉘고 가능과 불가능을 정하기도 한다. 신체적인 능력, 경제적인 상황 같은 현재의 문제들로 먼 미래의 시간을 예측하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예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고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 무거운 바윗돌을 가볍게 들거나, 빠르게 달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런 능력이 없다고 멈추어 서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큰 변화는 천천히 오랜 시간을 두고 일어난다. 시간만 있다면 우리 모두에겐 어떤 희망도 꿈꿀 자격이 있다. 장애도 힘든 상황도 어떠한 소수성도 단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오늘의 시간을 너무 힘겹게 여기는 제자들이 크게 성장한 제자들과 지금은 크게 대비되어 보이지만 이 녀석들에게도 긴 시간이 가져 올 느리지만 큰 변화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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