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윤선의 무장애 여행] 삶에 속도 조절이 필요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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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에 있는 영각 ⓒ전윤선
▲봉은사에 있는 영각 ⓒ전윤선

[더인디고=전윤선 집필위원]

더인디고 전윤선 집필위원
▲더인디고 전윤선 집필위원

여행을 시작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장애인, 노인, 영·유아 동반 가족 등은 더욱 그렇다. 휠체어 탄 장애인 등 관광약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여행은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무장애 여행은 물리적 접근성, 정보 접근성, 서비스 접근성까지 장벽 없는 여행을 추구해 관광약자의 여행의 권리를 보장한다, 최근 산사에도 장애인과 고령의 여행객이 증가하면서 접근성을 개선하고 있다. 하지만 산이라는 지형의 특성과 문화재인 건물이 많아서 접근성 개선 속도가 더디기만 하다. 그렇다고 산사 여행을 전혀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조금씩 개선되어 가는 산사를 자꾸 찾아보면 인식이 개선돼 무장애 사찰 여행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늦은 봄이면 부처님 생일을 기념해서 사찰을 찾는 여행객이 많아져 사찰 여행은 마음이 따듯함으로 채워진다.

인생에 있어 다시 돌아오질 않을 지금, 이 순간 일상을 기록하고 추억을 만들어 기억을 저장하 데 여행은 좋은 활동이다. 여행하기 좋은 시기는 오늘이 가장 젊고 장애도 가장 경한 날이다. 여행은 꿈을 꾸게 하고 가슴 뛰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여행 테마가 있지만 사찰 여행은 유독 마음이 가고 편안해진다. 느리게 거닐며 나를 돌아보게 하는 사찰 여행으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의 공간을 채워본다.

▲일주문(진여문) ⓒ전윤선
▲일주문(진여문) ⓒ전윤선

빌딩 숲으로 가득한 강남 한복판에 봉은사가 있다. 봉은사는 소음을 차단하고 고요가 흐르는 공간이다. 끊임없는 개발로 부를 상징하고 ‘오빤 강남스타일’로 K-문화 창출의 메카이기도 하다. 그 변화와 역동의 중심에 천년의 시간을 붙잡고 있는 도심 속 사찰 봉은사는 오늘을 쉬어가는 쉼표와 느낌표를 찍게 한다. 봉은사는 장애인, 노인, 외국인도 즐겨 찾는다.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에 내려 7번 출구 방향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오면 봉은사와 만난다. 도로변에 위치해 무심히 지나치기 쉽지만 부처가 태어난 룸비니 동산과 음향각이 먼저 보인다.

음향각은 불교용품을 판매하는 건물로 문턱이 없어 휠체어 탄 사람도 쉽게 진입할 수 있다. 음향각에서 이것저것 불교용품을 구경하다가 나무로 만든 수저 세트를 사고 나왔다. 바로 옆 여여 카페에서는 부드러운 커피 향이 가는 길을 막아선다. 화장실이 보장된 곳이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달달한 케익으로 당 충전과 향긋한 커피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여유를 즐겨 본다. 커피와 사찰의 분위기는 제법 잘 어울린다. 대한제국 시절 고종황제가 처음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백여 년의 시간이 흐르며 대중화됐다. 그런데 서래원 커피는 천 년 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봉은사와 합이 잘 맞는다.

▲포화대상 ⓒ전윤선
▲포화대상 ⓒ전윤선

일주문을 지나면 왼쪽 연못 위에 미륵불의 화신인 ‘포화대상’이 호탕하게 웃고 있다. 포화대상은 금복주 스티커 표지 모델과 닮았다. 모든 걸 내려놓고 세상을 떠돌며 연꽃 같은 삶을 자유롭게 살다간 포화대상. 그의 석상을 보니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가 생각났다. 떠돌이 노동자로 살아간 에릭 호퍼는 독서량이 많았다고 한다. 책을 읽으며 인간의 본성을 성찰하기 시작했고 깊은 사색으로 얻은 통찰과 사회에 대한 냉철한 현실 인식은 전후 미국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쳤다. 어느 시대나 사색을 통한 깨달음은 자유로운 삶으로 이어진 것 같다. 누군가는 철없는 학문이 철학이라고 하지만 철학적 사유가 없으면 인간 본성을 깨닫는 것은 힘들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사회를 보는 통찰도 밋밋할 것 같다.

발길을 옮겨 오른쪽 경사길로 올라갔다. 짧은 경사길을 지나면 흙길이다. 흙의 기운도 고스란히 내 것이 되는 봉은사. 사찰에 울려 퍼지는 예불 소리는 긴장된 마음이 차분해지고 따듯함으로 채워진다. 봉은사에는 유독 노인과 외국인이 많다. 도심 속에 자리한 사찰이어서인지 외국인에게 안성맞춤 여행지인 것 같다. 여행객 중에는 수동휠체어 탄 노인과 가족도 눈에 띈다. 그러고 보면 전동휠체어를 타고 여행하면 좋은 점도 많다. 먼 길을 걸어도 다리가 안 아프고 주변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다리가 아프지 않으니 마음의 여유도 유지돼 여행하는 내내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전동휠체어는 배터리 동력으로 움직인다. 내가 사용하는 전동휠체어 배터리는 30 km 거리는 거뜬히 이동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하루 종일 봉은사를 둘러봐도 배터리 걱정 없이 희희낙락 여행이 이어진다.

▲해우소 ⓒ전윤선
▲해우소 ⓒ전윤선

다시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법왕루에 이르고 오른쪽엔 해우소가 있다. 넓은 공간에 장애인 화장실에서 근심을 비우니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우는 것은 더 중요하다. 휠체어 탄 장애인 등 관광약자는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해우소가 있어 봉은사 여행이 더 좋아진다. 비울 수 없는 여행은 불안과 초조함으로 여행의 질을 떨어뜨린다.

발길을 돌려 부처님과 만날 수 있는 대웅전에 닿았다. 늘 그렇듯 대웅전은 계단 투성이다. 경계 긋고 있는 계단 때문에 대웅전 안으로 진입할 수 없으니 부처님도 뵐 수 없다. 세월 흘러도 변하지 않은 것과 넘을 수 없는 것은 계단만이 아니다. 사회 곳곳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지천이다. 성별이 달라서, 피부색이 달라서, 휠체어를 타서, 가난해서, 학벌이 달라서, 지역이 달라서, 나라가 달라서 등 다양한 경계를 그어 밀어내는 사람과 밀려지는 사람이 있다. 밀려나지 않으려 연대하고 함께 살아가려 애쓰는 이들에게 봉은사는 위로를 건넨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경내에는 부처님 오신 날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하늘에는 각자의 소원을 담은 오색등이 걸려 있고 몸을 낮춘 사람들은 합장하며 탑돌이를 한다. 휠체어 탄 노인도 대웅전 앞에서 머리를 숙여 기도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족은 흐뭇한지 노인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낸다.

▲명상길과 흙담, 연등 ⓒ전윤선
▲명상길(좌)과 흙담, 연등(우) ⓒ전윤선

봉은사 명상길로 발길을 이어갔다. 봉은사 명상길은 봉은사 숲에 조성된 1.2 km의 산책길이다. 휠체어 탄 사람은 명상길 일부만 산책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숲이 주는 편안함은 도심의 찌든 때를 싹 씻어주는 것 같다. 빠르게 돌아가는 첨단 사회는 번아웃을 유발한다. 경쟁이 심화되고 변화의 속도도 빨라 자칫하면 뒤쳐져 따라가지 못 하거나 포기하게 만든다. 속도 조절도 버겁고 정도 조절은 생각도 못한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를 무능력자라고 자책하게 되고 도태되게 한다. 속도에 지친 사람이 찾아도 좋을 도심 속 힐링 공간 봉은사는 말하는 것 같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속도를 스스로 조절하려는 마음이라고…….

  • 무장애 여행 팁
  • 가는 길: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
  • 접근가능한 식당: 봉은사 앞 코엑스 다수
  • 접근가능한 화장실: 봉은사, 봉은사역 등 다수

[더인디고 THE INDIGO]

사)한국접근가능한관광네트워크 대표. 무장애관광인식개선교육 강사. 무장애 여행가로 글을 쓰며 끊어진 여행 사슬을 잇는 활동을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습니다. 접근 가능한 여행은 모두를 위한 평등한 여행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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