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한잔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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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집에서의 공부가주와 안주
사진=더인디고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안승준 집필위원]  요즘은 방학기간이라 평소 만나지 못했던 분들과의 만남이 많은 편이다. 특별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는데 내 글이나 강의에서 ‘술’이라는 소재를 자주 사용했는지 처음 만나는 분들도 “술 좋아하시지요? 글 봐서 알고 있습니다.”라는 인사들을 건네신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마디는 언제나 같다.

“술 한잔하시지요.”

내가 단연코 확신하건대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에서 술을 한잔만 먹은 경우는 한 번도 없다. 그런데도 누구를 만나든 언제 만나든 한결같은 인사말은 “술 한잔하시지요.”이다.

어떤 분의 말씀처럼 “오늘은 소주 18잔만 마시지요.”라고 하면 좀 이상하고 어색할 수는 있겠지만 적당한 음주의 선을 지킨다는 면에서는 정확한 수치를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취하도록 마시고 또 마시는 술 문화가 만연한 우리나라에서 ‘오늘 먹을 술의 잔 수 정하기’라는 캠페인이 있을 만도 한데 아직까지 그런 비슷한 것을 들어보지 못한 걸 보면 대한민국 국민 다수는 정확하고 냉정한 것보다는 조금 허술하더라도 인정을 느끼는 쪽을 선호하는 것 같다.

어쨌거나 그런 인사말 덕분에 우리가 함께하는 술자리의 한잔 한잔은 모두 독립 변수로 존재한다. 첫 잔은 두 번째 잔에 영향을 주지 않고 두 번째 잔도 세 번째 잔과는 별도의 한잔일 뿐이다. 숫자를 정해놓고 시작한 자리가 아니므로 매번 따르는 술잔은 새롭다. 처음 잔도, 마지막 잔도 우리는 언제나 한잔을 마신다.

같은 맥락에서 “한 병만 더 하시지요.”라는 문장도 그다지 큰 효력이나 구속력을 가지지 못하고 때로는 “한 군데만 더 가시지요.” 또한 마찬가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애주가 호칭을 받는 나의 주장이지만 술자리를 단순히 술을 먹기 위해 가지는 이는 거의 없다.

단순히 소주 몇 병, 맥주 몇 병 실컷 먹고 싶은 사람이라면 집에서 혼자 먹는 편이 여러 가지로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다. 한잔만 더할지 한 병을 더 가져올지 쓸데없는 실랑이를 벌일 필요도 없고 “어떤 안주가 좋을까요?” “어떤 주종으로 할까요?”라며 시간을 보낼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주당들이 술이 아닌 술자리를 즐기는 것은 그 시간이 술을 마시는 시간이라기보다 사람을 따르고 관계를 마시는 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인간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서로에게 본능적 경계심을 가진다. 술이 가지는 가장 큰 힘은 경계의 벽을 허무는 것이다. 사람을 좀 더 인간적으로 만들고 유연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친구의 폭은 넓어지고 이해의 범위도 커진다.

“한잔하실래요?”는 50밀리리터 알코올을 먹자는 의미보다는 조금 더 마음을 열고 시간을 공유해 보자는 의미인 것이다. 그것이 17잔이나 18잔 같은 고정된 상수가 아니라 언제든지 다른 한잔으로 옮겨갈 수 있는 독립 변수라는 것은 서로가 가까워지는 데 미리부터 한계를 정하고 싶지 않은 바람을 담은 언어인 것이다.

한잔을 부딪치는 시간을 만들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한잔을 나눌 수 있는 자리만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많은 잔을 기울일 수 있고 예상하지 못할 만큼 가까워질 수도 있다.

“우리 한 번 만나요.” “밥 한 번 먹어요.”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계속 잘 하고 싶으면 매 순간 한 번씩만 잘 하면 된다. 끊임없이 가까워지고 싶다면 매 순간 한 걸음씩에 충실하면 된다. “한잔하실래요?”는 그 마법이 시작되는 인사이다.

방학이 끝나가면서 잠잠하던 코로나가 다시 극성이다. 당분간은 왁자지껄 떠들면서 한잔 나눌 시간은 조금 어려울 것 같다. 그렇지만 끝없는 질병이나 고통은 없다는 걸 믿기에 언젠가 다시 찾을 평화로운 일상을 기대하며 인사를 건네고 싶다.

“우리 한잔하실래요?”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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