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잡썰] 비명(碑銘)에 남길 ‘우리’의 이름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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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석의 잡썰] 비명(碑銘)에 남길 ‘우리’의 이름 찾기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체계는 장애를 가진 몸으로 인한 ‘불편함’, 그리고 ‘가난’하다는 것. 이 선입견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장애인’으로 퉁쳐 취급해도 되는 대상화(objectification)의 견고한 이유이기도 하다. ⓒ 픽사베이 편집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장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이니 제법 오래전 겪은 일이다. 여전히 기억 한 끝에 남아 있는 걸 보니 꽤나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어린 시절 시설 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 몇몇과 어울려 낮술을 시작으로 해가 저물고 밤이 고즈녁할 때까지 퍼마신 적이 있었다. 해가 지자 귀밑이 얼얼할 만큼 꽤 쌀쌀한 밤이었다. 불콰해진 술기운을 빌어 호기롭게 봉천동 술집들이 밀집한 한 골목을 배회하던 중 용케 눈에 띈 술집 처마에는 노랗게 불밝힌 갓등이 매달려 있었다. 일본식 다다미 구조의 목조건물이었는데 여닫이 출입문은 가는 나무로 짠 기하학적 무늬가 일렁였다. 밤바람에 흔뎅이는 갓등 불빛 탓이었는지 은어 비늘처럼 번들거렸다. 정종을 따뜻하게 덥혀 내놓는 이자카야였고, 술값이 만만치 않았지만 내친걸음인지라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텅 빈 호주머니 사정을 어림하는 사이에 한 친구가 호기롭게 허세를 부리며 나무문을 열려는 듯 손잡이를 잡아끌었다. 버성긴 문틀이 삐걱대며 덜컹거릴 뿐 잘 열리지 않았다. 한 뼘쯤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 본 술집 안은 탁자 네 개를 두 개씩 쌍으로 양쪽 벽에 붙여 옹색했고, 바닥은 물을 흘렸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앞장 선 친구가 목발을 실내로 내미는 순간 한 서른 남짓 되었을까 싶은 한 사내가 득달같이 달려오더니 양손을 휘휘 내저으며 고함을 질렀다.

“가쇼, 어여 가쇼, 남 영업집엔 왜 기어들어와!”

목발과 휠체어를 탄 중늙은이 서넛을 동냥질 패거리로 여긴 모양이었다. 영락없이 거지 떼로 몰린 난처한 상황이었지만 꽤나 겪어 이골이 난 터라 친구는 술 한잔 먹겠다는 시늉을 하면서 몸뚱이를 들이밀었다. 그때, 사내의 거친 손길이 친구의 가슴을 사납게 밀어냈다. 사내의 위력에 밀린 친구의 몸뚱이가 나무문과 부딪쳤고 그 바람에 갓등이 심하게 흔들렸다. 노란 빛이 사내의 얼굴 위에서 성난 파도처럼 일렁였다. 살아오면서 이런 상황쯤이야 어지간히 겪어왔던 터지만 어느 순간에는 마음 끝이 저며올 때가 있다. 그날이 그랬다. 사내의 손길에 밀려 휘청이던 친구가 비명을 질렀고 곁에 서 있던 나 역시 맞고함을 질렀다. 목발 손잡이를 그러쥔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뻣뻣하게 굳은 등줄기가 서늘했다. 눈꼬리에 잔뜩 힘을 준 사내의 고리눈이 나를 향하더니 이내 가당찮다는 듯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여차하면 대차게 한 판 붙을 요량이었다. 어차피 쌈판이 벌어지면 일방적으로 얻어터질 테지만 까짓, 흠씬 두들겨 맞고 병원 신세 며칠 지며 푹 쉴 요량도 했었으니 말이다. 동행했던 친구들의 만류와 호기심에 주변을 기웃대던 취객 몇 사람이 끼여드는 북새통에 어찌어찌 상황은 끝났지만 골목을 되짚어 나오는 우리의 등 뒤에 사내가 쏟아낸 욕지거리가 여전히 귀에 선하다.

“재수 없게… 병신새끼들이 집구석에 처박혀 있을 일이지. 나 참 더러워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체계는 대개 두 가지로 구분된다. 우선 장애를 가진 몸으로 인한 ‘불편함’, 그리고 ‘가난’하다는 것. 이 두 가지 선입견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장애인’으로 퉁쳐 취급해도 되는 대상화(objectification)의 견고한 이유이기도 하다. ‘대상화’라는 논문을 통해 그 개념을 분명하게 규정한 법철학자이자 여성학자인 마사 누스바움은 그동안 우리 사회는 대상화 문제를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다면서 ‘사람을 사물로 대하는 7가지 방식’을 정리했다. ▶도구성(목적을 위한 도구처럼 대함) ▶자율성 부정(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대함) ▶비활동성(자주성과 활동성이 없는 것처럼 대함) ▶대체 가능성(다른 대상과 교환 가능한 것처럼 대함) ▶침해 가능성(해체하고, 부수고, 침입할 수 있는 것처럼 대함) ▶소유권(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매매할 수 있는 것처럼 대함) ▶주관성 부정(경험이나 느낌을 고려할 필요 없는 것처럼 대함)이다.

누스바움은 대상화란 본래 사물이 아닌 것을 사물화하는 것이며, 타인을 도구화하는 도구성은 자율성의 부정과 침해 가능성, 주체성의 부정 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약자에 대한 부도덕한 상황을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떠름한 기억으로 남은 그날의 소동을 함께 겪었던 친구 중 누구도 봉천동 조붓한 골목을 먼저 입에 올리려 하지 않았다. 짐작건대 나를 포함한 우리의 의도적 기억 회피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대상화(자율성 부정과 비활동성)하려는 그 견고한 틀을 당최 어쩌지 못한다는 무력감 때문이었으리라. 그럼에도 굳이 이 대단찮은 기억을 헤집어낸 이유는 단 하나다. ‘장애인’으로만 취급되는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가 이제부터라도 해야 할 일은 각자의 고유한 이름을 찾는 것이란 사실을 나 스스로 먼저 일깨우기 위해서다. 그래야 죽어 손바닥만 한 비명(碑銘)에라도 이름 석 자 떳떳하게 남길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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