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정의 정정당당] 보이지 않는 돌, 당사자는 맞아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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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와 입과 눈을 가린 원숭이 ⓒ픽사베이
▲귀와 입과 눈을 가린 원숭이 ⓒ픽사베이

[더인디고=조미정 집필위원]

▲조미정 더인디고 집필위원
▲조미정 더인디고 집필위원

분개할 만한 두 건의 장애인 차별 사건을 최근 접하게 되었다. 발달장애인 한 사람이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헬스장에 등록하러 갔는데, 장애인 감면을 해준다고 해서 복지카드를 제시하니 발달장애라는 이유로(현재 등록 발달장애인은 모두 중증이다) 보호자가 없으면 이용할 수 없다며 등록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다른 사례를 들어보겠다. 정신장애 특성으로 인해 자주 쓰러지는 당사자가 자신을 거부하는 헬스장 곳곳을 전전하다가 장애인을 받아준다는 곳을 찾아내 등록을 한 일이 있다. 그런데 헬스장 안팎에서 자주 쓰러지고 때로는 경찰에 신고까지 당하니 주변에서 항의 민원을 받게 되었고, 결국 헬스장 업주는 이용일을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헬스장에 문의하니, 운동을 할 수 있거나 운동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진단서를 가져오라고 하며 등록을 막았다. 상태가 좋지 않아 진단서를 받을 수 없던 당사자는 결국 공원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두 건의 사례는 굳이 독자 여러분께 질문을 던지지 않더라도 너무나도 명백한 장애 차별이다. 하지만 차별이 차별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차별은 다른 사람이, 사회가 당사자에게 던지는 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돌은 명백한 차별이기는 하되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지만 그 돌을 맞은 상처는 너무나도 쓰리고, 아프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한국의 장애인들은 그러한 돌을 매일 맞고 있다.

인지하지 못한 채로 저지르는 장애 차별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 장애 그 자체에 대한 무지
2. 특정 장애 유형에 대한 무지
3. 장애의 비가시화
4. 차별의 정의와 범위 간과

이들 네 가지 유형에 공통된 표현이 하나가 있다. 바로 ‘인식하지 못함’이다. 장애든, 장애 유형이든, 차별이 무엇이든, 심지어는 장애가 있는지 없는지도 인식하지 못했을 때 차별이 발생한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고 말했다. 누군가가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꽃이 된다면, 장애 차별을 차별이라고 부르면 그것은 비로소 차별이 된다. 비극은 차별을 차별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대개 그 차별의 피해자라는 점이다. 가해자는 차별을 차별로 부르지 않아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채로 차별을 저지르지만, 피해자는 차별을 차별로 온전히 인식하므로 슬픔과 분노로 반응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두 건의 차별 사례는 상대방이 정신(적)장애를 이유로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게 차별이라고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만약 이들이 이것을 차별이라고 인지했다면 그 차별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거나 최소한 중재하려는 노력이라도 했을 것이 자명하다.

장애를 이유로 한 서비스 거부의 사례는 비교적 인지하기 쉬운 장애 차별이다. 그 말은 인지하기 어려운 장애 차별이 있다는 문장도 있다는 것이다.

정신장애계에도 인지하기 어려운 차별이 있다. 바로 장애계에서 비가시화된 성격장애에 대한 차별이다. 2021년 9월, ‘침묵의소리’라는 정신장애 자조모임에서 정신질환 언론보도 가이드라인을 새로 제시하면서, “인격장애와 정신질환을 묶어서 보도하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이 문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정신장애와 인격장애는 다르다는 것이고,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우리’ 정신장애는 ‘너희’ 인격장애와 다르다는 뜻이 된다.

이 자조모임에서 정신장애와 혼동되는 대상이 다른 유형의 장애, 가령 발달장애라면 ‘발달장애와 정신질환을 묶어서 보도하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었을까? 그런 말을 하고 보도자료를 내더라도 발달장애 단체의 항의를 받지 않을 수 있었을까?

발달장애는 독립된 법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권리옹호의 목소리가 커졌고, 부모단체도 활발하게 운영되며 당사자단체 역시 점점 생겨나고 있다. 발달장애 차별을 발달장애 차별이라고 온전하게 인지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니 발달장애를 차별하는 언행을 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성격장애는 다르다. 성격장애가 사회적 장애(disability)인지, 아니 정신질환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성격장애가 넓은 유형의 장애로 인지되지 못하기 때문에 자조모임 등지에서 성격장애인과 ‘거리두기’를 하며 성격장애인을 차별하는 것이다.

장애인이 어디서나 존재하듯 성격장애인 역시 어디서나 존재한다. 그러나 성격장애인은 존중받아야 할 장애인으로 인지되지 않기 때문에 성격장애인에 대한 차별 역시 장애 차별로 인지되지 않는다. 다른 정신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이 보이는 돌도 맞고 보이지 않는 돌도 맞는다면, 성격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모두가 보이지 않는 돌이다. 그 돌에 맞은 성격장애인의 상처 역시 보이지 않는 상처이다.

하지만 어떤 장애를 경험하든, 어떤 차별을 경험하든, 그 차별이 보이는 차별이든 보이지 않는 차별이든 그 돌을 맞은 당사자의 상처는 너무나도 아프다. 아파서 쓰러질 지경이 된다.헬스장 이용을 거부당한 정신장애인은 그 충격으로 급성기를 호소하고 있다. 성격장애인 차별을 당하는 나 역시도 항의도 제대로 못하고 분노를 삼켜야 했다.

건강 상태를 이유로 한 서비스 배제가 배려가 될 수 없듯이, 다름을 이유로 한 법외장애인 배제도 당사자 운동이 될 수 없다. 당사자 운동은 차별을 재생산하는 운동이 아니다. 자신이 받은 차별의 고통을 더욱 약한 당사자에게 푸는 운동은 더더욱 아니다.

당사자 활동가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의문을, 돌을 던진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 자신을 차별하는 사람들에게, 구조적인 폭력을 일삼는 사회 시스템에. 그러나 같은 당사자에게는 돌을 던지지 않길 바란다. 사회가 정신(적)장애인에게 던져온 차별이라는 아픈 돌을 같은 당사자에게 던지지 않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내가 간단하게 만든 성격장애인 인권선언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성격장애인 인권선언>
1. 성격장애인은 존중받아야 할 정신장애인이며, 비장애인과 동등한 시민이다.
2. 성격장애인의 각 유형은 서로 평등하다.
3. 성격장애인은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4. 성격장애인은 부당한 대우에 항의할 권리가 있으며, 이는 증상으로 취급받아서는 안 된다.
5. 성격장애인은 오직 자신이 저지른 잘못만 책임을 지며, 성격장애 그 자체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갖지 않거나 과도한 책임을 떠맡지 않을 권리가 있다.
6. 성격장애인은 뜻을 같이하는 당사자와 연대할 권리가 있다.
7. 성격장애인은 함부로 평가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8. 성격장애인은 모욕적인 호칭으로 불리지 않을 권리가 있다.
9. 성격장애인은 자신의 병명을 당당히 밝힐 권리가 있다.
10. 성격장애인은 필요시 사회의 복지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더인디고 THE INDIGO]

정신적 장애인의 당사자주의는 아직 미약하다. 정신적 장애인이 정말 당찬 당사자주의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미약한 당사자주의가 창대해질 수 있도록 자그마한 글을 건넨다.
승인
알림
6630869922848@exam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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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ydole@hanmail.net'
이지도르
10 days ago

안녕하세요. 저도 장애가 있는 사람입니다. 두번째 사례로 들으신 분에 대해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글을 남깁니다. 헬스장에서 자주 쓰러지셔서 경찰을 부르고 민원이 들어와 이용을 제한 했다는 상황은 장애여부를 떠나 각종 기구를 사용하는 헬스장의 특성상 누구에게나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당사자 뿐만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충분히 위험한 상황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닐까싶습니다. 이를 장애 차별의 예시로 들으신 것이 적절한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어 글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