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순의 토크백] 슬세권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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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내 전동휠체어 전용 공간 ⓒ유금순 집필위원
▲열차 내 전동휠체어 전용 공간 ⓒ유금순 집필위원

▲유금순 더인디고 집필위원
▲유금순 더인디고 집필위원

[유금순 = 더인디고 집필위원] 슬세권은 슬리퍼와 흔히 역세권(驛勢圈)이라고 쓰이는 세권을 합성한 말로써 슬리퍼 차림으로 각종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주거 권역을 의미한다고 한다. 전통적인 거주지 선택 기준은 지하철역과 가까운 역세권이었지만, 슬세권이 주목받고 있다는 것도 포털사이트로부터 알게 되었다. 이는 2030세대를 중심으로 집 근처에서 여가를 보내는 문화가 확산하면서 가까운 거리에 카페, 편의점, 영화관, 은행, 도서관, 쇼핑몰 등이 있는지를 중요시하는 이들이 늘어남에 따라 생겨난 현상이라는데, 기울어진 설명 같은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내가 거주하는 집에서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전동휠체어로 걸었을 때 15분 정도 시간이 소요되니까 난 슬세권에 사는 걸까, 역세권에 사는 걸까. 슬리퍼를 신고 문밖을 나서면 온통 슬세권일 수 있는 세상은 과연 모두에게 해당이 될까? 나에게 신발이란 발을 감싸는 양말 위에 덧신는 또 하나의 외출복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신어서 밑창이 닳았던 신발은 지금까지 살아온 나에겐 없었고, 다만 싫증이 나거나, 유행에 어느 정도 따라가기 위해 바꿔주는 패션 아이템 같았다.

사실 나에겐 신발보다 시종일관 전동휠체어가 관심사였다. 십만 원 안팎의 신발은 때로 사치 같아도 기백만 원, 기천만 원을 호가하는 옵션 빵빵한 전동휠체어는 언제든 넋을 놓고 바라보면서 내 것이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그리고 4년 전에 어렵사리 몇 가지 옵션이 탑재된 전동휠체어를 부산에서 샀고, 이제까지의 전동휠체어에서 맛보지 못한 편안한 승차감에 꽤 오래 행복했다. 신발로 비유하자면, 시장표 단화를 신다가 ‘벗고 싶지 않은 편안함’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어느 유명 운동화쯤을 신은 느낌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명품 가방이나 구두를 수선하듯 값비싼 휠체어도 장인의 손길에 감쪽같이 수선되면 좋으련만, 고장이라도 나면 새로 사는 것에 맞먹는 값 지불을 해야 하거나, 아예 새로 사야 하는 실정 때문에 휠체어 사용자들은 ‘house poor’ 아닌 ‘footwear poor’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동차 타이어는 차의 콘셉트, 운전자의 취향을 고려하고 이용하는 도로와 환경에 맞춰 제품을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신발보다 싼 타이어’라는 마케팅으로 호객했던 타이어 전문점을 길에서 볼 때마다 저가에 주목하여 놓치게 될 안전은 누가 책임지려나 걱정스러웠다. 비싸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요, 싸다고 다 나쁜 것도 아니지만, 장시간 몸을 맡기며 자세 보완까지 가능한 전동휠체어도 결과적으로 비쌀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아무튼 나는 휠체어를 신으면, 때로 내리지 않고 어딘가로 내리달리고픈 충동에 휩싸이곤 한다. 배변과 배터리 걱정 없이 먹고 싶은 음식 먹어가면서 맘 가는 대로 싸돌아다니고 싶은 발효된 숙원 말이다.

내겐 전동휠체어가 실내화이자, 슬세권을 누빌 수 있는 슬리퍼이자, 달릴 때 착용하는 런닝화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모래 위를 거닐 수 있는 샌들은 아니지 싶다. 그렇게 나를 싣고 슬세권을 넘어 역세권으로, 기차나 비행기나 배를 타고 광역이동을 할 때도 신발 아닌 신발 같은 중임을 맡는 전동휠체어는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애착 관계이다.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활동지원서비스라고 지난 글에 언급했었는데, 맞춤형 보조기기 역시 그렇다. 몸으로 사는 세상, 몸 얘길 안 할 수 있나. 신발이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아니다. 그 슬세권이란 말이 어떤 이들에겐 해당 없음과 다용도 신발 같은 전동휠체어에 몸을 싣고 자유롭게 편의시설을 누리고, 가고픈 곳으로 떠나는 것 자체가 세간에 알려지거나 보이는 만큼 자유롭지 않다는 불편한 진실임을 같이 생각해보고 싶었다.

수년 전에 나는 집에 있는 리프트에서 전동휠체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오른쪽 무릎을 다쳤었다. 여행은커녕 일상생활에서도 다친 무릎을 유리그릇 다루듯 해야만 했다. 밥 먹고, 잠자고, 배설하는 일상 외에 친구가 불러들인 장애 관련 단체에서 동료상담을 배우고, 상담가로 활동하면서 어쩌다 기차로 광역 이동하는 당일치기 여행 정도가 전부인 큰 변화 없는 날들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애 관련 단체 인권강의 강사로 만나게 된 한국접근가능한관광네트워크의 전윤선 대표를 통해 여행에 눈뜨게 되었고, 내게도 여행세포가 숨겨져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도를 아십니까?”라는 물음처럼, “무장애여행을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넘어 전동휠체어를 비행기에 탑재하고 여행이 가능하다는 그녀의 말은 외국어처럼 들려서 내겐 해석이 필요했다.

그랬던 나는 몇 달 후 장애 관련 기관의 지인 두 명과 여행경비를 각출하고 여행 배낭을 꾸려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여행 배낭에 수건을 넣고, 화장품 샘플에 서너 벌의 옷과 모자 등을 쟁여 넣은 내게 전 대표는 줄일 것과 꼭 챙길 것 등 여행 가방 싸는 법을 일러 주었다. 평상시 복용하는 여유분의 약과 전동휠체어 배터리 충전기와 타이어 점검, 우비나 캡모자, 해외여행일 경우 평소 주치의의 처방전 등이 그것임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행에서 맞을 수 있는 경우의 수에 대한 각오도 얼마간 필요함을 배웠다. 그녀의 가이드로 마침내 여행자보험을 비롯한 휠체어 여행을 준비한 후 무릎보호대를 하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남편은 아주 걱정스러운 눈빛과 동시에 매우 신기한 눈빛으로 나를 배웅하였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는 당부와 함께. 그때 내겐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도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을 안전하게(?)만 살다 죽을 건지, 모험 같은 무장애여행을 한 번쯤은 해볼 건지 선택해 볼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집 밖에서가 아닌 집 안에서 두 번 무릎을 다쳤고, 균형을 잃고 바닥에 90 도로 넘어진 것도 수차례였으니 집만이 안전하다고 누가 내게 말할 수 있을까.

어디서 읽었더라, 오래된 집에는 상처가 많다는 말을. 오래된 집은 편안하지만, 상처가 있기에 가끔 여행길에 오르고픈 마음이 집 밖으로 나설 용기를 빚어낸다.

전동휠체어의 발재간과 민첩함으로 들여다보는 제주는 그보다 수년 앞서 수동휠체어에 몸을 싣고 에둘러 밟아봤던 제주와는 딴판이었다. 수동휠체어는 어떤 신발에 비유할 수 있을까.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생각난다. 보기는 좋은데, 조심스럽고 불편한 유리구두. 수동휠체어로 한 여행은 동행인들에게 미안한 나머지 수박 겉핥고, 수박 맛을 상상하는 여행 같았다.

노란 유채 빛의 4월 제주는 금세 비를 뿌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간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낯선 여행지에 홀려 행여 집에 돌아가는 길을 잊을세라 헨젤과 그레텔처럼 돌멩이 같은 불신을 버리고, 빵 부스러기 같은 의심을 날리면서 그녀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 날이 맑으면 맑아서 좋고, 비가 오면 우비를 입고 달렸던 올레21길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노라니 어느새 빗물에 눈물이 뒤엉켜 있었다. 3박 4일 동안 가졌던 포부만큼 자세히, 느리게, 샅샅이 여행할 순 없었지만, 여행의 찐 감동을 맛본 시간이었기에 7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녀가 가자는 대로 어디라도 좋았던 제주, 그때의 제주여행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감동과 용기를 주었다.

“할 수 있었던 것이었구나! 왜 이제야 했을까?”

남 등에 업히거나, 남이 밀어주는 수동휠체어에 앉아서 가졌던 마음의 부채감과 불편함을 이기지 못해서 억압했던 지난 시간이 아깝고, 또 아까웠다. 여행은 내가 했는데, 집에서 나를 맞이한 남편은 내 얼굴에서 제주가 준 힘을 읽은 듯 대견해하였다.

걷는 방식이 다를 뿐인 나도 신발 신듯 휠체어를 신고, 가까운 거리의 카페, 편의점, 영화관, 은행, 도서관, 쇼핑몰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싶다. 그뿐만 아니라 가까운 거리 아닌 먼 거리도 슬리퍼를 신고 유유자적 자유롭게 여행하고픈 간절함이 있다. 내 생에 한 번이면 족하다 싶었던 7년 전의 제주도 여행이 잠들어 있던 내 여행 세포를 깨웠고, 그 후로 부족하나마 교통약자의 이동을 위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면서 길고 짧은 여행을 즐기고 있다.

주거 지역의 편의점에 턱이 있다면 슬세권이 아니요, 광역 이동한 여행지에 단차 없는 커피숍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휠체어를 신는 내겐, 누군가에겐 역세권이자 슬세권이지 않나 싶다. 꽃비 나리는 봄밤, 트레이닝복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어디든 자유롭게 밟아볼 수 있는 슬세권이 모두의 것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몇 자 끄적였다.

[더인디고 THE INDIGO]

장애인권강사, 동료상담 및 사례상담가로 활동하였으며 2019년 대전 무장애 관광 가이드북(무장애대전여행)을 발간(5인 공저)하였습니다. 현재 한국접근가능한관광네트워크 이사,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소속 직장내장애인인식개선교육과 활동지원사 및 근로지원인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 실제 교육과 보수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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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oon9291@naver.com'
이윤호
1 month ago

잘 읽었습니다~~~
저에게는 사소한것이 남에게는 소중한것임을 깨닫습니다.
앞으로도 장애인 인식개선 과 강사로써 활동을 응원합니다~~~

soon7935@hanmail.net'
유금순
1 month ago
Reply to  이윤호

격려와 응원 감사합니다, 원장님!

soppy22@hanmail.net'
박정혜
1 month ago

갚이 공감합니다^^
특히 누군가 밀어주는 수동휠체어애서의 부채감!!!

soon7935@hanmail.net'
유금순
1 month ago
Reply to  박정혜

불편함과 부채감 없는 자유로운 일상을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