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경의 컬처 토크] 또 다른 세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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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운드 오브 메탈’의 한 장면. 사진은 루벤이 자신의 캠핑카와 음악장비 등 전 재산을 팔고 인공와우 수술을 받으러 가는 장면이다. /사진=유튜브 캡처
▲영화 ‘사운드 오브 메탈’의 한 장면. 사진은 루벤이 자신의 캠핑카와 음악장비 등 전 재산을 팔고 인공와우 수술을 받으러 가는 장면이다. /사진=유튜브 캡처
  • 영화 <사운드 오브 메탈(Sound of Metal), 2019>

[더인디고=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더인디고 편집위원

대부분의 사람은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인 줄 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온전히 나의 것이며 영원할 거라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착각일 뿐 온전한 내 것도 없고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훨씬 더 많다. 루빈 역시 또 다른 세상을 알지 못했다. 지금 그가 듣고 있는 세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영화 ‘사운드 오브 메탈’, 소리를 잃고 또 다른 세계를 만난 남자의 이야기다.

루벤은 드러머이다. 헤비메탈 밴드 블랙가몬에서 그는 드럼을 치고 연인 루는 노래를 한다. 둘은 음악을 함께 하고 캠핑카에서 함께 살며 자유롭고 행복하다. 음악을 함께 하는 연인과 음악을 하며 사는 루벤에게 소리를 잃는다는 것은 어쩌면 전부를 잃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인지 모른다.

소리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 영화가 그 느낌을 생생하게 알려주었다. 어느 순간 모든 소리가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흐르는가 하면 어느 때는 소리의 파편들이 날카로운 쇳조각처럼 귓속에 꽂히는 느낌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물속으로 침잠해 가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다양한 소리의 변화를 음향으로 실감 나게 구현해냈다. 소리를 통해 관객이 루벤의 입장에서 루벤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드는 뛰어난 음향효과로 이 영화는 아카데미 음향상을 비롯해 편집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청력의 80% 이상이 손실된 루벤의 청력으로는 이제 드럼도 칠 수가 없다. 드러머라는 이름은 그를 증명할 가장 확실한 것이었는데 이제 그 이름을 잃은 그는 무력감을 느낀다. 또 사랑하는 루와도 이젠 제대로 된 소통이 어렵다. 병원에서 제시한 수술비는 루벤에겐 너무 큰 비용이라 선뜻 감행하기엔 엄두가 안 난다. 결국 루가 아는 지인의 소개로 루벤은 조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청각장애인 공동체 마을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얼마간 지내며 수어도 배우고 달라진 삶에 적응하는 방법을 좀 배우면 곧 루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루벤을 공동체에 받아들인 조와 루벤의 목적이 서로 달랐다. 루벤은 그저 어떻게든 소통할 방법으로 수어를 얼른 배우는 것이 목적이지만 조는 루벤이 ‘청각장애인 되기!’, 즉 청각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조에게 있어 청각장애는 불리하거나 고쳐야 할 무엇이 아니다. 그러나 루벤은 그렇지 않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루벤에겐 무능한 것이며 하루속히 고쳐야 할 질병일 뿐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메탈’ 포스터. /사진=네이버
▲영화 ‘사운드 오브 메탈’ 포스터. /사진=네이버

수어로 웃고 떠드는 청각장애인들 사이에서 이방인처럼 앉아 있는 루벤. 관객 역시도 청각장애인들이 나누는 대화들이 무슨 말인지 루벤처럼 알 수가 없다. 자막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청각장애인들이 나누는 대화들에 자막을 달지 않음으로써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루벤의 고립감을 관객도 느끼도록 만든다. 수어를 쓰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관객 역시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수어로 대화도 가능해지고 어느 정도 공동체에 적응한 것처럼 보일 즈음, 루벤은 조 몰래 자신의 캠핑카와 음향기기를 팔아 병원에 가서 인공와우 수술을 받고 만다. 어떻게든 소리로 가득한 일상 속으로, 그리운 루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진 전 재산을 쏟아부은 수술이었는데 결과는 루벤의 기대와는 달랐다.

인공와우를 통해 전달되는 소리는 이전에 그가 알던 소리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소리들은 파편처럼 부서져 들려왔고 뇌는 인공와우를 통해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듣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공와우 수술로 조와는 완전히 이별하고 조를 떠나 루를 찾아간 루벤. 여전히 루와 루벤은 서로를 사랑했지만 어쩐지 예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잠든 루를 뒤로하고 루의 집을 나온 루벤은 시끄러운 도시 속을 걷다가 문득 멈추고 인공와우를 귀에서 빼버린다. 순간 시끄러운 소리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고요해진다. 자신이 선택한 그 고요함 속에서 루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 서재에서 보낸 그 수많은 아침 중에, 가만히 앉아서 침묵의 순간을 느낀 적 있었나? 네 말이 맞아, 루벤. 세상은 정말로 계속해서 변하고, 지독하게 차가운 곳이기도 하지. 하지만 내게는 말이야, 그 침묵의 순간이, 그곳이 바로 천국이야.”

매일 새벽 자기 책상에 와 앉아 무언가를 써보라던 과제를 루벤에게 내주며 조가 바랐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루벤이 그 침묵의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되는 것! 조를 떠나 날카로운 소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스스로 인공와우를 빼며 루벤은 조가 말한 그 고요함이 주는 평안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아닐까.

언어 너머에 수많은 표정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닿는 진심이 있다는 것을, 피아노 소리를 귀가 아니라 열 개의 손가락 하나하나 전해지는 진동을 통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루벤은 이미 조의 공동체 안에서 느끼고 보았다. 다만 들리는 세계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릴 수 없었을 뿐.

이제 그에겐 귀를 닫으면 열리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더인디고 THE INDIGO]

라디오 방송과 칼럼을 쓰고 인권 강의를 하면서 나름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을 걸어왔습니다. ‘easy like Sunday morning...’ 이 노래 가사처럼 기왕이면 일요일 아침처럼 편안하게 문화를 통한 장애 이야기로 말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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