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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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미래가 표시된 표지판 ⓒunsplash
▲과거와 미래가 표시된 표지판 ⓒunsplash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학생 시절 맹학교 기숙사에서 모아두었던 용돈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적이 있다. 주머니 어딘가에 두고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어디서 떨어뜨린 것인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사실 기억이 난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건물 구석구석을 더듬어 가며 그 흔적을 찾아다닐 수는 없었다. 슬리퍼로 꼼꼼히 바닥을 비벼가며 복도와 계단을 찾아다녀 봤지만 내가 찾는 물건이 내게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세대 주택에서 자취하던 어느 날엔 위층에서 새어든 물 때문에 4년 대학 생활 동안 수작업으로 만든 점자 전공 서적이 모조리 못 쓰게 된 적이 있었다. 말려보고 더듬어 보기를 반복했지만 그 또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며칠 전엔 관리 소홀로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20여 년 동안의 자료가 모두 날아가 버렸다. 이번엔 뭔가 헛된 발버둥이라도 쳐 볼 수 없을 만큼 컴퓨터를 통째로 잃어버린 터라 쓸데없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다섯 살 무렵엔 달리는 기차 창문으로 아끼던 모자가 날아갔고 10년 전 출근길엔 선물 받은 장갑 한쪽을 마을버스에 두고 내렸다.

아주 어릴 적 기억이거나 별것 아닌 사건임에도 너무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그것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불가능에 대한 극단의 아쉬움이 각인되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자도 장갑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오히려 나의 숱한 기억 속에 묻혔을지 모르겠지만 상실의 충격은 지금도 그 순간 그 물건들을 명확하게 기억하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그만큼 아쉬웠고 되돌려지지 않는 시간을 되돌리려는 노력으로 허비했다.

잃어버린 용돈들도 내 주머니에 있었다면 몇 번의 의미 없는 소비로 없어져 버렸겠지만 다시 찾을 수 없었다는 그 하나의 슬픈 기억이 마치 굉장히 큰돈을 잃은 것처럼 머릿속에 남아있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분명 그 순간 손실임에 분명하지만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그 어떤 손해를 입더라도 다른 방법, 다른 물건들로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이기에 밀려드는 아쉬움마저 극복할 수는 없겠지만 돌아올 수 없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불가능한 가능성에 시간을 허비하는 일일 뿐이다.

20년 정도 쌓아진 데이터를 한 번에 잃어버렸다는 것은 내게 정말 큰 충격임에 분명하지만 그것이 되돌아올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이번 사건 또한 상실의 기억으로 내 머릿속에 오랫동안 각인되어 존재하겠지만 어쩌면 그 또한 잃지 않고 존재했다면 큰 의미 없는 동행으로 내 곁에서 서서히 잊혔을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이라는 것이 내게 실제적 잃어버림의 가치보다 몇 배 더 큰 감각으로 다가올 뿐 실제 내가 입은 손해는 그보다 작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 자료들을 이따금 꺼내 보는 것이 내 미래의 삶에 엄청난 도움이 될 수 있었다고 한들 그 가정은 다시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을 헛된 가정일 뿐이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면 그리고 그것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단념의 용기가 필요하다. 지나가 버린 기차는 오랫동안 바라본다고 돌아올 리 없다. 돌아올 리 없는 기차를 아쉬워할 시간에 우리는 다음 기차 티켓을 사거나 또 다른 교통수단을 찾아야만 한다.

되돌릴 수 없는 것에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면 새로이 얻게 될 것마저 놓치게 된다.

난 잃어버린 장갑이나 모자 대신 수많은 다른 것을 얻었다. 텅텅 비어버린 내 컴퓨터의 저장장치에도 다시 차곡차곡 자료가 쌓이게 될 것이다.

대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시력의 상실마저도 어느 틈에 난 다른 것들로 채워가고 있다. 내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돌아올 수 없는 지나간 것들이 아니라 새롭게 그것들을 대신할 것들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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