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에게 삶의 자부심을 주는 말을 발견해야 하지 않는가?

[더인디고=김형수 집필위원]

『아무리 기묘하고 이상하게 여겨질지라도 이를 ‘병적’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부를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 올리버 섹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 중에서

더인디고 김형수 집필위원

7년 전, 토끼띠 동갑이셨던 나의 형수님이 덜컥 임신을 하셨다. 나름 노산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이래저래 검사할 것이 많다고 우리에게 오시면 늘상 투덜거리셨다. 그러다 임신 5~6개월 정도 지나고 시댁에 오셔서 나와 우리 어머니를 식탁 앞에 불러 놓고는 아주 진지하게 물었다.

며칠 전에 다운증후군 검사를 했고 관련 양수 호르몬 수치가 높게 나와서 걱정이 많으시다는 이야기. 의사는 추가 검사를 하자는데 어찌 해야 하냐 하셨다. 보통 상황에서는 분위기가 머쓱해지거나 무슨 말을 할 줄 몰라 침묵과 정적이 흘러야 일반적이긴 한데 우리 집안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형수님 등짝이라도 한대 때릴듯이, 한 치의,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에이 뭐 그런 것을 걱정이냐. 장애인 당사자로 45년 넘게 살아온 사람도 있고, 그걸 키운 사람도 있는데…”라고 대답했다. 책임지고 키워준다고 걱정마시라고 순풍순풍 낳으시라 했다. 이후에 형수님이 추가 검사를 하셨는지 낙태까지 권유를 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올해 둘째 조카는 엄청 말 많은 7살 둥이가 되었다.

장애에 대하여 존재 긍정을 하는 것은 애초에 우리가 긍정적이어서가 아니다.

40년 동안 차별과 존재를 동일시 하는 것에 저항하고 사람들의 시선 폭력과 비장애인과 또는 다른 장애인과 비교하는 평가 폭력에 맞서왔기 때문이다. 한 살 때 나를 만난 의사는 부모에게 장애가 당신들의 잘못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고 부모의 잘못이라는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집안과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진단을 강하게 튕겨내서 죄책감을 가지지 않도록 하였다.

필자의 뇌병변 장애에 대한 부모님의 반복된 학문적 접근은 장애의 감정적 종교적 판단이 아닌 이성과 과학에 근거한 판단을 할 수 있게 했다. 부모의 장애에 대한 이성적 수용은 무엇보다 기존 사회의 평가와 타인의 수군거림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하게 한다.

장애로 태어난 것이 부모의 잘못이 아니거니와, 절대 완전하게 비장애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 개선할 수는 있지만 장애를 완치할 수는 없다. 그래서 부모는 장애를 만났을 때 이제 ‘선택’하셔야 한다. 당신들께서 장애를 가치있는 것, 의미있는 것, 멋있는 것으로 선택하셔야 한다.

이런 선택의 힘은 내 경우를 보시다시피 주변 전문가와 가족들의 지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하셨다 하더라도 그것을 행동으로 표현하려면 반복된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마치 연극 대사 연습하듯이, 눈빛과 말투 행동까지. 특히 부모님들의 말과 태도는 주변 사람들이 금방 배우고 대중들에게 빨리 전염된다.

장애인이 사회적으로 비장애인만큼 존중받기를 원하신다면 부모님부터 당연히 사회적으로 공간과 관계가 바뀌면 어떤 말을 써야 할지 인권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등학교 인권 강의에서 나온 어느 비장애인 학생의 강의 후기

어느 날 오랜만에 자폐를 가진 그림 작가님과 그림책 제작 회의를 했다. 두 시간 내내 우리는 그를 작가님이라고 불렀는데 매니저라고 따라온 가족은 그를 두 시간 내내 ‘우리 아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가 자폐인으로 존재하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필요하고 그가 그림으로 표현하는 그 의사 소통을 이해하고 싶어서 그를 만났는데, 우리가 그에게 무엇을 물어볼 때마다 그 매니저는 대답을 가로채고 시간도 주지 않고 우리 아이는 그런 거 알지 못한다, 표현 못한다고 부정적 평가만 하셨다.

그래도 우리는 두 시간 동안 그가 무슨 작업이 좋은지 작업 시간이 얼마인지 알게 되었다. 그림작가로서 그의 프로필을 인정하고 그림값을 이야기하는데, 매니저는 두 시간 동안 우리 아이를 어디 취직시켜 달라는 말씀만 하셨다. 우리는 그 가족이 “작가가 얼마나 소질이 있는지, 그림값을 더 인상하기 어려운지” 로비해 주길 바랬다.

말과 표현들은 언제나 그 역사성, 관계성, 위치성을 함께 갖고 있다. 중요한 건 정작 당사자가 어떤 이름으로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불리고 싶어 하느냐를 항상 점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도 직장에서 누구를 부를 때 항상 과장으로 부를지, 선생님으로 부를지, 이름으로 부를지, 어떤 어감으로 어떻게 부를지 고민하지 않는가? 장애를 가진 사람을 지칭할 때 이 정도의 고민과 조심성과 의전을 고민하면 좋겠다. 그 정도의 인권 감수성은 부모님들이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중증 장애라도 장애 자체가 고통이고 불행이지는 않다. 그런 장애에 대한 사회 환경과 반응과 해석이 고통과 차별과 혐오를 만든다.

장애에 대한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장애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된다. 장애인 가족들이나 전문가들이나, 장애로 쌓은 경험과 좋은 점은 잘 발견 못하고 나쁜 경험만을 부각시키거나 그곳에서 회피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어찌보면 그것은 동물로서의 마땅한 본능일 수 있고 어찌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그것을 뛰어 넘을려고 노력한다.

개개인은 그 본능에 저항하기 힘들지라도 단체들은 각 개인들이 그 본능에 저항할 수 있도록 보다 인권적인 반응과 평가를 이끌도록 개인을 이끌고 방향을 제시해 주었으면 한다.

우리 목소리와 우리의 요구를 보고 맘 카페에서 “그래 장애를 가진 자녀, 멋있게 낳아서 키워보자” “내 자녀가 살다가 장애인이 되어도 괜찮겠네” 이런 반응을 이끌 어휘가 이제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을까?

▲지체 장애를 가진 사람이란 표현보다 때로는 세상에서 목발이 제일 잘 어울리는 분이라는 표현이 더 강력하지 아니한가?

우리가 장애에게 힘과 자부심을 주는 말들을 발견하고 찾아야 않을까? 말의 인권 감수성은 중요하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위치와 지위 또한 중요하다.

장애를 둘러싼 많은 부모와 전문가, 당사자들조차 사회와 타인에게는 이것을 민감하게 요구하지만 정작 우리 스스로에게는 너무 그것에 관대할 때가 있다. 물론 그것이 관조이거나 풍자이거나 사적 대화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공공의 표현이거나 사회적 발언일 때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끼리의 관조나 하소연이 타인에게는 전형적인 자기 혐오로 전염되어 그것이 집단에 대한 혐오나 차별로 확대되기에 문제가 심각하다. 장애인 부모들이 특수학교를 지어달라고 국회의원에게 무릎을 굻는 것도 전략적으로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그 행위에 있어 표현 방식은 장애 혐오이자 자기 혐오이다. 차라리 그 앞에서는 헌법책을 집어 던지고 인권위에 진정을 해야 했다.

물론 부모 개인에게는 이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 있지만 부모 단체는 사전에 고민했어야 할 문제이다. 그 모습을 보고 많은 대중들이 ‘내 가족 중에 장애인 학생이 등장해도 당당히 권리를 요구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장애인 학생을 낳으면 어렵구나’ 생각할까?

최근 필자가 반대했던 장애인 부모들의 청와대 청원에서의 발화는 약간 양상이 다르다. 그들의 발언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넘나들고 있고 하나의 사건 때문에 평소에는 무시되다가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발화 권력과 기록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즉 일반 대중에 대한 재생산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과는 달리 상대방에 있는 장애인 당사자는 대항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나는 그것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기록과 비판을 에둘러 손가락질이라고 힐난했지만 난 그 손가락을 철회할 생각이 별로 없다.

아무리 청원이 급하고 정당하더라도 그 전개 표현이 반인권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단체로서의 바로 인권 감수성을 점검해야 할 지점이라는 것이다. 중증의 발달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자유롭게 청원을 읽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유형의 능력이 뛰어난 장애인이었다면, 다른 소수자였다면, 부모나 부모단체라도 장애인 자녀와 함께 그런 표현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청원할 수 있는가에 문제 제기해야 한다. 그 표현은 대중적으로 드러날 수 없는-장애인 자녀 살해 후 부모 자살을 이야기하는 살인 모의죄이자 극단적 선택을 조장하는 명예 자살의 합리화–일뿐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극단적 선택은 ‘불명예’스럽고 금기가 되어야 그것을 줄일 수 있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국가가, 사회가 같은 맥락의 표현을 했으면 크게 문제될 표현들이 사적인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에서 부모라서 이해되고 수용되어야 하는가는 동의할 수 없다. 양보하여 그 해당 부모는 그럴 수 있다고 한들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는 다른 장애인 부모가 문제가 되는 표현을 반복하는 것은 인권적으로나 범죄학적으로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제 장애인 돌봄의 참혹한 현실을 인권적으로 정책적으로 대중에게 알려 변화를 끌어낼 새로운 표현을 발견해야 한다. [더인디고 The Indigo]

현)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총장, 1975년 뇌병변 장애를 안고 태어나 1989년 1월 30일 지체장애 2급으로 등록하였다. 장애물없는생활환경시민연대 전임 연구원과 장애인 교육권연대 사무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 유일 장애인 고등교육을 지원하는 인권 시민 교육 단체인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 피플퍼스트 운영위원과 서울북부장애인보건의료센터 장애인건강관리교육지원협의회 위원으로도 활동하면서 인권교육과 권리 옹호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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