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윤선의 무장애 여행] 해거름은 느긋하고 동해는 경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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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해변 ⓒ전윤선
▲망상해변 ⓒ전윤선

[더인디고=전윤선 집필위원]

더인디고 전윤선 집필위원
▲더인디고 전윤선 집필위원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동해시 묵호역에서 내렸다. 묵호는 다른 이동 수단 없이 여행지와 바로 연결되어 휠체어 사용자 등 관광약자가 여행하기 편리한 곳이다. 묵호역에서 내려 묵호 등대에 먼저 가기로 했다. 묵호 등대까지는 휠체어로 금세 간다. 등대에 들어서면서 동해가 파랗게 하늘과 맞닿아 있다. 묵호 등대는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 촬영지이기도 하다. 1968년 촬영된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정소영 감독이 연출하고 문희, 신영균, 전계현, 김정훈이 출연한 영화로 당시 한국 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우던 화제의 작품이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영향력은 이후 한국 멜로드라마의 지형을 바꿀 만큼 대단했고 최근까지도 영화 역사가들에게는 한국 영화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 꼽는다.

묵호 등대에 ‘행복한 논골 우체통’은 공중전화 박스에 담겨 있다. 요즘 여행지마다 느린 우체통은 다 운영하는 것 같다. 여행지의 감정을 엽서나 편지지에 써 일 년 후 집으로 배달되면 당시의 감성이 새삼스럽기도 하고 그때 이런 생각을 했었나 싶어 쑥스럽기도 신기하기도 하다. 묵호 등대에도 느린 우체통은 빠질 수 없는 여행 콘셉트다.

▲등대 옆 논골담 ⓒ전윤선
▲등대 옆 논골담 ⓒ전윤선

묵호 등대에 새로운 명소가 하나 더 늘어났다. 동해도째비골 스카이밸리다. 스카이밸리는 묵호등대와 월소택지 사이에 있는 도째비골에 동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전망시설과 체험시설을 조성해 묵호의 핫한 여행지로 사랑받고 있다. 스카이밸리는 강화유리로 만든 전망대도 겸하고 있어 공중에 떠있는 투명 길이다.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넷플릭스 영화 ‘오징어 게임’이 생각난다. ‘오징어 게임’에서 유리로 된 징검다리는 그냥 유리와 강화 유리를 구별해 건너는 사람만 살아남는다. 가끔 스카이워크 강화유리가 깨질까 전동휠체어 탄 여행객의 출입을 막거나 현장에 비치된 수동휠체어로 갈아타라고 한다. 전동휠체어 무게는 대략 100 kg~160 kg 사이다. 사람이 타거나 짐까지 싣는다면 대략 270 kg 안쪽이다. 그런데 스카이 워크가 전동휠체어 무게를 못 이기고 깨진다면 애초에 허가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스카이 워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하며 사진도 찍고 논다. 전동휠체어를 탔다고 해서 스카이 워크에 갈 수 없다고 막는다면 처음부터 안전에 결함 있는 스카이 워크다. 휠체어는 장애인에게 다리와 신발 역할을 한다. 어떤 신발을 신을지는 당사자가 자신의 장애 상태에 따라서 알아서 선택한다. 그 선택은 어떤 상황에서도 존중되어야 한다.

▲스카이벨리 ⓒ전윤선
▲스카이벨리 ⓒ전윤선

이 길을 따라 전망대 끝까지 가면 온몸에 소름이 돋고, 다리는 후들후들 떨린다. 발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에 눈앞에는 동해가 손짓한다. 풍경은 아주 멋지지만, 심장 뛰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 오줌이 찔끔 나올 것 같다. 멋진 풍경은 무서움을 동반해야 더 짜릿한 거 같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엘리베이터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가 해랑 전망대로 가는 길이 너무 가팔라 다시 올라왔다. 묵호에는 묵호 등대, 스카이밸리, 논골담, 해랑 전망대까지 인생샷 명소로 가득하다. 논골담은 산동네이고 계단 천지여서 휠체어 탄 여행객은 논골담으로 내려가는 것은 불가하다. 벽화로 가득한 논골담 대신 바다로 빠져들어 갈 것 같은 길로 가기로 했다.

▲해맞이길 가는 길 ⓒ전윤선
▲해맞이길 가는 길 ⓒ전윤선

해맞이 길을 따라가다 삼본아파트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 길은 일출로와 이어진 길이다. 언덕에서 해맞이 길로 내려가는 풍경이 과히 장관이다. 이 길은 tvN 드라마 ‘마더’에서 주인공 수진이 혜나의 진짜 엄마가 되어 함께 도망치던 길이다. 혜나의 담임선생님인 수진이 가정 내 아동 폭력을 눈치채고 혜나를 지옥에서 구출하려 보호자를 자처한다. 이 드라마 초반 배경은 내가 좋아하는 묵호 바람의 언덕이다. 이 길의 아름다움은 드라마를 통해서도 선명히 드러나고 휠체어를 타고 내려가면서도 극도의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이 길은 ‘마더의 길’이라고 내 마음대로 정했다. 그래서 이 길은 해방의 길이고 지옥에서 탈출하는 수진과 혜나의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은 고된 일상에서 해방된 여행자의 길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묵호와의 인연은 오래됐다. 공동체 라디오 ‘그녀들의 수다’ 방송을 할 때 그녀들과 묵호로 무작정 여행을 감행했다. 거침없는 그녀들의 앙큼 상큼한 일탈 여행으로 우린 결연하게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청량리역에서 무궁화호 기차를 타면 여섯 시간 가까이 걸려 묵호역에 도착했다. 그때만 해도 동해로 가는 대중교통은 무궁화호밖에 없었다. 묵호역에 내리면 승강장과 기차의 단차가 너무 높아 어마무시했다. 기차에 경사로를 쭉 빼고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휠체어 탄 승객이 오르고 내려야 했다. 엄청나게 가파른 경사 때문에 역무원과 승무원이 총동원돼 휠체어가 미끄러지지 않게 앞에서 밀고 뒤에서 당기며 아슬아슬한 외길 같은 경사로로 내려야 했다. 어찌나 위험하든지 까딱 했다간 휠체어가 전복되는 불상사가 발상할 우려가 다분했고 그런 위험은 어디를 가나 일상이었다.

당시엔 물리적 환경이 폭력적이어서 목숨 걸고 여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용기 있게 길을 나섰던 여행. 사람들은 휠체어 타고 온 우릴 신기해했고 이 먼 곳까지 어찌 왔는지 궁금해했다. 심지어 멍멍이의 시선은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쫓아왔다. 다행인 건 묵호엔 장애인이 운영하는 ‘해변민박’이 있어 숙박 걱정은 덜었었다. 또 묵호역에 내리면 다른 이동수단 없이 묵호 등대와 논골담, 묵호 어시장, 망상해변까지 전동휠체어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였다. 숙소에서 망상해변까지는 6 km 남짓했고 보도 중간에 전봇대와 턱, 가로수가 길을 막아 차도로 가야 했었다. 참 무식한 환경이었지만 그럼에도 장애인이 자꾸 밖으로 나와야 장애인도 돈 쓰는 여행자라고 알려야만 했던 시절. 이제는 묵호의 핫플 여행지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장애인 화장실은 가는 곳마다 생겨나고 식당의 턱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호텔에 무장애 객실도 늘고 장애인 콜택시와 저상버스도 지속해 확충돼 이동 걱정을 덜고 있다. 지금은 무식해도 무모해서도 안 될 무장애 여행. 이젠 장애인도 안전하고 보편적인 여행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바다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마더’ 길은 해맞이 길과 연결된다. 오른쪽은 어달항과 논골담, 해랑전망대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는 대진해변과 망상 해변까지 이어진다. 해맞이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망상해변까지 휠체어 타며 걸으며 대진 해변을 들렀다 가기로 했다. 대진해수욕장은 수심이 낮고 파도가 적당해 서핑을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파도와 함께 절경을 만들어내는 갯바위와 선박이 드나들며 멋진 바닷가 마을의 풍경이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서울 경복궁의 정 동방은 이곳 대진항이라고 한다. 정동진이 광화문에서 정 동쪽이라는데 대진항도 정 동쪽이라 한다.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여행자로서는 헷갈리기도 한다.

대진항을 둘러보고 망상해변으로 발길을 이어갔다. 일출로 따라 망상해변까지 해파랑길을 내어 자전거 라이더들은 동해안 종주 여행을 하고 있다. 휠체어를 타는 사람도 안전한 길로 갈 수 있게 됐다. 망상해변과 이어진 해파랑길에는 망상역 옆에 국가철도공단 망상수련원까지 장미꽃 넝쿨이 담장을 휘감아 이어져 있다. 지금은 기차가 서지 않는 망상역이지만 망상해변을 찾는 이가 많을 때는 사람들로 붐비기도 했다. 망상해변 오토캠핑장은 2018년 열린관광지로 선정돼 접근성 개선을 했지만 여전히 불편하다. 카라반에 경사로를 설치해 휠체어 타고 올라갈 수 있지만 정작 카라반 진입 문은 턱이 있고 카라반 안 시설물도 회전 공간이 없어 휠체어 탄 사람이 이용하기엔 불편하다. 차라리 리조트나 캐빈하우스에서 숙박하는 것이 접근성 면에서는 훨씬 유리하다.

▲해변데크길 ⓒ전윤선
▲해변데크길 ⓒ전윤선

망상해변은 데크로가 만들어져 있어 휠체어 탄 사람도 해변 가까이 접근하기 편리하다. 휠체어를 타고 바닷물 가까이까지 갈 수 있는 것은 쉽지 않은데 망상해변은 데크 길 중간 쯤 회전공간도 있어 되돌아 나올 때도 편리하다. 해변 초입에는 빨간색 시계탑이 망상의 상징처럼 우뚝 서있다.

▲망상해변 빨간 시계탑 ⓒ전윤선
▲망상해변 빨간 시계탑 ⓒ전윤선

낯선 듯 낯설지 않은 동해는 여행자의 빈 마음을 가득 채워준다. 살다 보면 일상에서 살짝 벗어나 마음 둘 곳이 있는 건 자신만의 아지트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바닥난 에너지가 마음 가득 충전돼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해거름은 느긋하고 그 걸음 마중한 동해는 경쾌하다.

무장애 여행 팁

  • 가는 길: ktx 묵호역, 강원도교통약자광역이동지원센터 즉시콜(전화: 1577-2014)
  • 접근가능한 식당: 묵호 까막바위 앞, 묵호어시장 등
  • 접근가능한 숙박: 망상 해변 캐빈하우스(Tel.033-539-3600)
  • 접근가능한 화장실: 묵호어시장, 까막바위 앞, 망상해변

[더인디고 THE INDIGO]

사)한국접근가능한관광네트워크 대표. 무장애관광인식개선교육 강사. 무장애 여행가로 글을 쓰며 끊어진 여행 사슬을 잇는 활동을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습니다. 접근 가능한 여행은 모두를 위한 평등한 여행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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