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바리데기꽃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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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에 안개가 가득한 모습

상희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아이의 돌이 달포를 훨씬 지난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햇볕이 아파트 베란다 가득 널려있는 희디흰 광목 기저귀를 따사롭게 적시는 하오였다. 바람을 가득 머금은 기저귀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반짝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퇴근하기가 바쁘게 집에 들어온 진우는 헐렁한 체크무늬 반바지에 러닝셔츠 바람으로 아이와 뒹굴었고 그녀는 팔을 베고 누워 방문 틈으로 부녀를 바라보며 설핏한 낮잠이 막 들려는 참이었다. 전화를 받은 것은 진우였다. 미란은 까무룩 사그라드는 잠 속에 한 발을 디딘 채 진우의 예의 그 어눌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고 했으나 의식은 자꾸 허방을 디뎠다.

긴 뚝방이 짙은 안개 사이로 길게 뻗어있다. 뚝방 바닥은 안개에 젖어 검었다. 작은 여인이 안개 속에 묻혀있다. 키가 작은 곱사등이다. 그 뒤를 한 계집아이가 고무신을 찔꺽거리며 내닫는다. 뒤통수가 허옇게 민숭한 계집아이의 단발머리에 물방울이 맺혀있고 이를 악물었는지 발갛게 상기된 볼이 단단하게 부풀어 있다. 바닥을 튕기는 공처럼 계집아이의 종아리가 팽팽하다. 막내 고모…, 막내 고모…, 계집아이가 작은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안개 속에 외친다. 키 작은 여인이 비로소 뒤를 돌아본다. 여인이 입고 있는 저고리는 땟국에 절어있고 작은 보퉁이를 안고 있다.
어디 가? 계집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그러자 키 작은 여인은 들고 있던 보퉁이를 풀어 그 안에 담겼던 것을 계집아이에게 불쑥 내민다. 짚으로 엮어 만든 인형이다. 이거 너 가져, 니 꺼야. 계집아이가 그 인형을 받아드는 순간 할머니가 계집아이를 바짝 안아들고는 소리친다. 얼른 가거라. 훠이훠이 가거라. 노인의 흰 고무신이 떨어뜨린 짚세기 인형을 밟았다. 계집아이는 할머니의 품에 잡혀 할머니의 성마른 음성이 무서워, 밟힌 인형이 불쌍해서 노인의 품에 얼굴을 묻는다. 가거라, 얼른 네 세상으로 가거라.

“이봐 전화 받아, 상희 씨래.”

겨우 낮잠에서 놓여난 미란이 진우가 쥐여 준 송수화기를 귀에 대자마자 상희의 목소리가 쏜살같이 들려왔다.

“잤니? 너 팔자 좋구나. 연이 돌 때 못 가서 미안해. 꼭 가려고 했는데 어디 짬을 낼 수가 있어야지. 이제 겨우 시간이 좀 났어. 오늘 들릴게. 괜찮지?”

통화는 상희의 일방적인 방문 통보로 끝이 났고, 여전히 가수면(假睡眠) 상태에 놓여있던 미란은 꿈속에서 보았던 막내 고모의 꾀죄죄한 입성을 애써 기억해냈다. 송수화기를 맥없이 내려놓고 멍하니 앉아있는 그녀에게 진우가 수건을 건넸다.

“나쁜 꿈이라도 꾼 거야? 웬 땀을 그렇게 흘려?”

젖가슴께에 땀이 흥건했다. 욕실로 간 미란은 얼굴을 찬물에 씻었다. 선잠 뒤끝의 어수선한 꿈자리 탓인지 아릿한 편두통이 느껴졌다. 그녀는 대야에 가득 받은 찬물에 얼굴을 담갔다. 왜 하필 막내 고모가 나에게 짚세기 인형을 주었을까? 그때 딸아이의 자지러질 듯한 울음소리가 그녀의 귀청을 찔러왔다. 이어 욕실 문이 열리고 진우의 음성이 들려왔다.

“좀 나와 봐. 아기가 갑자기 저렇게 우네, 어쩌라는 건지 원.”

상희는 때늦은 방문을 만회하려는 속셈이었는지 별로 필요하지도 않아 보이는 아기용품을 한 아름 싸들고 왔다. 일회용 기저귀세트, 젖병세트에서부터 체온계, 해열제 등 소소한 유아용 응급약품까지 살뜰하게 챙겨왔고, 그걸 풀어본 진우는 연신 입을 벙싯대면서 상희의 세세한 배려에 고마워했다. 원래부터 아기를 무던히 귀여워했던, 그래서 소아과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던 상희는 자리에 앉자마자 연이를 찾았고, 그런 친구의 심성을 잘 알고 있던 미란은 잠들어 있는 아이를 냉큼 안아다 품에 안겨주었다.

“어머, 예뻐라. 요 손 좀 봐. 꼭 단풍잎 같다, 그치?”

잠들어 있는 아이가 깨어나면 또 울음보를 터뜨릴 테지만 우선 미란은 아이가 예뻐 죽겠다는 듯 껴안고, 입을 맞춰대는 상희를 보자 마음이 흐뭇해졌다. 그러다 아이가 깨어나 다짜고짜 울어대자 난감해하던 상희에게 아이를 받아든 미란은 뭔가 친구의 표정이 굳어졌다고 느꼈던 것이다.

“왜, 아이가 이상해? 침을 좀 많이 흘려.”

“응? 아… 아냐. 그냥 좀… 그래, 예뻐서 그래 너무 예뻐서…”

그러나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굳이 같이 하겠다고 상희는 우겼다. 식기가 담긴 개수대에 세제를 풀고 수세미로 기름때가 묻은 접시를 함께 닦으면서 그녀는 상희가 자신에게만 할 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지 않고서야 집안일이라면 영 젬병인 그녀가 설거지를 자청하면서까지 둘만의 시간을 일부러 만들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저, 연이 말이지 언제부터 저런 증상을 보였니?”

미란의 손에 들려있던 접시가 개수대에 빠졌다. 개숫물이 튀어 앞섶을 적셨다. 미란은 상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증상이라니? 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하고 묻고 싶었지만 턱뼈가 말을 듣지 않고 그냥 떨려올 뿐이었다. 그녀의 반응에 상희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도 않은 채 침착하게 개숫물에 빠진 접시를 건져 올려 수세미질을 했다.

“이건, 그냥 짐작일 뿐이야. 흥분하지 말고 들어. 내 생각에는…”

접시바닥을 문질러대는 상희의 손끝도 가늘게 떨리고 있다고, 그래서 미란은 더욱 불안한 심정으로 그녀의 옆얼굴을 쳐다보며 접시를 빼앗았다.

“연이에게 아무래도 C.P(Cerebral Palsy) 증상이 있는 것 같아. 좀 더 정밀한 검사가 필요하겠지만 내 짐작엔…….”

상희는 금테 안경을 검지로 밀어 올리며 말끝을 흐렸다. 미란이 손에 들렸던 접시가 다시 미끄러지듯 개숫물에 빠졌다. 뇌성마비라니, 내 아이가, 그럴 리가 난, 난, 아무 잘못도 없는데… 남편도 그저 무르기만 할 뿐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할 줄 모르는, 그래서 운전도 안 배웠다고 히물쩍 웃는 그런 사람인데.

상희가 연이의 정밀검사를 위한 절차를 자신이 미리 알아보겠노라는 말만 남기고는 쫓기듯 돌아간 후에도 미란은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녀의 말이 맞을 것이었다. 상희는 자신 없는 말을 함부로 내뱉을 만큼 경솔한 성격이 아닌데. 아니다, 아닐 것이다. 이번만큼은 상희가 실수한 거야. 못된 기집애 같으니라구. 서른이 넘도록 시집 못 간 분풀이를 그런 터무니없는 악담으로 하다니, 나쁜 기집애. 애먼 상희에게 욕설을 마구 퍼부어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머릿속을 철수세미로 박박 문질러대는 것만 같은 느낌에 미란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영문을 알 도리 없는 진우는 왜 그래? 할 뿐 여전히 아이를 껴안고 방바닥을 뒹굴며 딸랑이를 흔들어댔다.

미란은 배를 깔고 방에 가만히 엎드렸다. 두 손을 포개 턱에 괸 그녀는 무추룸하게 진우와 놀고 있는 연이를 쳐다보았다. 내 아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라며 그녀를 어르던 어머니의 그 알쏭달쏭했던 말을 뼈저리게 실감케 했던 저 작은 생명체가 모진 병에 걸려있다니. 아이가 돌이 지나도록 앉지도 기지도 못하는 것을 그저 늦된 줄로만 알았다. 약간의 사시(斜視) 증세도 유아기에는 충분히 있을 수 있으며 턱받이가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흘리는 침도 때가 되면 멈출 것이라고 여겼는데.

상희의 선배라는, 아이를 검진한 여의사는 미란이 책상 앞에 와 앉을 때까지도 펼쳐놓은 차트에 대고 뭔가를 기록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란이 쭈뼛거리며 의사에 옹송그리고 앉자 그제야 여의사는 고개를 쳐들었다.

“연이의 이런 증상은 언제 처음 발견했죠?”

“글쎄요, 그게 잘…”

“김 선생한테 얘기 들었어요. 연이 어머니께서 무엇보다 자세하게 말씀해 주셔야만 연이가 보이는 증상에 대한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답니다. 그래야 이에 따른 재활치료 프로그램을 마련할 수 있겠죠.”

미란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자신이 이 여의사에게 주눅이 들고 있다고 느꼈다. 눈을 감고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연이에게 무슨 증세가 있었던가? 가끔 팔다리가 빳빳해지고 머리와 목을 잘 가누지 못한다고 말할까, 아니면 젖꼭지를 잘 빨지 못하고 기저귀를 채울 때 다리를 잘 안 벌리려고 고집을 부린다는 사실도 말해야 하나. 작은 충격에도 애가 깜짝깜짝 경기를 일으켜 남편과 나를 놀라게 했고 눈이 약간 사팔뜨기라서 아이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가늠이 안 되는 것도 증상일까. 미란은 바들바들 떨리는 아랫입술을 깊게 사려 물었다. 이 여의사는 아이의 어떤 버릇을 얘기해도 모두 뇌성마비아가 보이는 증세로 몰아붙일 것만 같아 겁이 났다. 여의사의 손에 들린 펜 끝이 유리판이 깔린 책상 면을 도도독, 두드려댔다.

“제 소견으로 보면 연이에겐 C.P 증세가 보입니다. 흔히 뇌성마비라고 불리는데 임신 초기부터 생후 4개월 사이에 주로 발생하죠. 미성숙한 대뇌의 결함이나 비진행성 병변으로 인한 뇌기능의 마비로 운동능력, 지능, 감각활동 등의 신경장애 증후군이 보이는 것이죠.”

여의사의 말이 귓속을 웅웅 맴돌 뿐 의식의 켜를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물론, 유전은 되지 않습니다만, 환자 당사자는 물론이고 부모님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일상생활을 스스로 할 수 있을 만큼 상당한 정도의 호전을 기대할 수도 있다는 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완치는 불가능하지만…….”

연이를 안고 병원 문을 나서는 미란의 다리가 자꾸 허청거렸다. 병원에서 큰길까지 이어진 아스팔트 둔덕길을 내려오는데도 그녀는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며 다리쉼을 하듯 무추룸히 서서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득히 높은 하늘이 희붐하게 뭉개져 보였다. 며칠을 서랍 속에 처박아 두었던 딸아이의 진단서를 남편 앞에 내놓으며 천형(天刑)을 받을 만큼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싶어 의심과 원망에 찬 눈으로 남편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맞바라보는 남편의 눈 속에서 사무친 핏발을 발견하고는 모골이 송연했다. 그 역시 자신과 똑같은 심정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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