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오늘] 반갑다 건조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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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줄에 나무집게가 걸려있다./픽사베이
▲빨래줄에 나무집게가 걸려있다./픽사베이

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조미영 집필위원] 남들이 건조기를 말할 때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냥 자연 바람에 말리면 되는 걸 굳이…’라며 엄두를 내지 않았다. 한 번씩 속옷을 코에다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 맡는 남편이 신경 쓰이긴 했다.

”으흠… 이 향기, 삶아서 빨면 요래 냄새가 좋다!“
흐뭇해하는 남편을 보면 자주 삶아야지 생각하면서도 그게 참 성가셨다. 서너 번 할 걸 한 번으로 생략하곤 했다. 세탁기에 장착된 ‘빨래 삶기’와 ‘건조’ 기능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냄새도 쿰쿰해서 사용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연이어 비가 오니 다른 건 괜찮은데 수건이 말썽이었다. 베란다 천장에 매달린 빨래 건조대의 바람은 너무 약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조명기구의 기능만 인정.

건조기를 들이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세탁실이 너무 좁아서였다. 에어컨 실외기를 외부에 설치하지 못하는 규정 때문에 손바닥만 한 세탁실에 실외기가 차지하는 공간은 더 크게 느껴졌다. 비비적거리며 세탁물을 넣고 꺼낼 때마다 나는 거인이구나 생각했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따로 설치하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고 그렇게 불편하게 살았다.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건조기를 들이고 싶었다. 뭔가 해야지 싶으면 바로 실행해야 하는 급한 성질 때문에 우선 건조기 검색에 돌입했다. 가격과 크기만 생각하고는 실물을 ‘영접’하니 생각보다 크기가 만만찮았다. 딱 16kg, 집에 있는 세탁기만 했다. 일체형은 냉장고보다 더 컸다. 그게 탐이 났다. 하지만 집에 있는 멀쩡한 세탁기를 두고 그걸 사는 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더 큰 난관은 그걸 들인다면 좁은 세탁실의 선반을 죄다 철거해야 가능했다. 일이 더 커지는 걸 직감하고 그냥 건조기에 시선을 꽂았다.

두 회사 제품을 비교 후, 전기료가 조금 나은 거로 선택했다. 남편은 고가의 가전제품을 슈퍼에서 우유 사듯이 그리 쉽게 사냐고 했다.

“그럼? 저 직원이 좀 더 싸게 살 수 있도록 설명하는 거 다 듣고 인터넷으로 사라고? 그건 좀 아니지…”

남편은 내가 판매 사원 생각해서 같은 물건을 더 비교해 보지 않고 너무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은 지나치게 꼼꼼하다. 의심도 많다. 사업을 하다 보니 그리되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처음부터 그랬다. 그게 남편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옥신각신하는 가운데 건조기는 나의 가사 도우미로 들어왔다.

안방 베란다에 세탁기와 떨어져 덩그렇게 서 있는 건조기가 보기 좋았다. 다른 건 몰라도 수건 촉감이 보들보들하고 무향인 것이 마음에 들었다. 바지는 약간 구김이 있어 다음부턴 따로 말려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입고 보니 다 펴져서 이런 신기술이 있나 싶어 만족감이 상승했다. 무엇보다 좁은 베란다가, 널어놓은 빨래들로 늘 어두웠는데 밝아서 참 좋았다.

수건을 개면서 포커페이스 안 되는 나를 보던 남편이 말했다.

“그리 좋나? 진작 사 달라고 하지 그랬노…”라며 본인도 흐뭇해했다.

10년 터울인 큰언니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는 겨울이었다. 내게는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 시기였다. 엄마가 언니네 집에서 해복구완을 해주고 오던 날, 내가 언니 시중을 들겠다고 나섰다. 생애 처음 혼자 시외버스를 타고 양산으로 갔다. 형부가 요리사였기에 내가 음식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언니 말동무를 하면서 조카의 기저귀를 빨았다. 마당에 있는 우물에서 빨래하고 나면 고사리 같은 손이 빨개졌다. 초 6년이었지만 나는 걸망해 보이는 편이라 누구 하나 안쓰러워하진 않았다. 하지만 사흘째 되는 날 밤에 나는 훌쩍훌쩍 울었다. 깜짝 놀란 언니가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어디 아프냐고 걱정하는 언니에게

“엄마가 보고 싶다 언니야…”

그랬다. 그때 내 인생 13년 만에 처음 엄마와 떨어져 살았던 사흘이었다. 빨래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큰언니는 동생이 우는 걸 미안해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당장 가서 엄마 젖 먹으라며 놀렸다.

양산에서의 사흘은 고생스러웠던 기억이 아니라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처음 세탁기를 사용할 때도 조카 기저귀 빨던 때가 떠올랐다. 건조기를 들이니 또 그때 일이 생각나 엷은 미소가 지어진다.

천 기저귀를 빨면서 세탁기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을 햇볕 잘 드는 빨랫줄에 널면서 건조기를 생각하지 못했다. 삶을 편리하고 여유롭게 해주는 가전제품을 이용할 때마다 이것들이 없었던 과거 여인들의 삶이 존경스럽다.

내가 편한 만큼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노고와 나빠지는 공기, 병들어 가는 지구를 잊지 말아야겠다. 누릴 것은 누리고 지킬 것은 지키는 가정주부로 뽀송뽀송한 일상을 보내야겠다.

이제는 말 할 수 있는 건조기를 빙자해 누구라도 만나서 수다를 떨고 싶은 날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 행복을 나누면서 따뜻한 사회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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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na@naver.com'
famina
2 years ago

ㅎㅎ재미있습니다 13세에 벌써 언니 산후조리 도왔다니 놀랍고 즐거운 경험입니다.

lem72@naver.com'
이은미
2 years ago

건조기가 편리하다고 다들 그러더라고요.
전 아직 사용해보지 못한 터라 장마철 눅눅한 빨래와 함께하네요^^
예전엔 세탁기도 없고 늘 손빨래하며 으찌 지냈나 모르긋어요. 편리해진 만큼 지구가 또 아파하니 그것도 걱정이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