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오늘] 멘토와 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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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책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픽사베이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책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픽사베이

[더인디고=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20대 중반인 아들의 유년기는 우리 가족이 가장 힘든 시기였다. 혼란을 넘어 고통 그 자체였기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자폐 성향’을 줄여 보고자 시작했던 수많은 치료와 교육에서, 교사들은 한 타임으로 정해진 40분만 잘 ‘때우면’ 그만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뭘 했다거나 울음 떼쓰는 바람에 수업을 전혀 할 수 없었다는 얘기만 전해 듣는 게 전부였다. 그들과는 내 아이의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인지가 좋아지면 자폐 성향도 사라지고 상동행동도 줄어들 거라는 믿음으로 날마다 치료실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며 아들을 고문했다. 나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양육이라 생각했다.

아들은 이래저래 무지한 엄마 때문에 치료교육이라는 이름하에 놀아야 하는 유년기를 힘들게 보냈다.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 헤매며 아들에게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는 나의 다짐은 우리 모자를 더 힘든 구렁으로 빠뜨리고 있었다.

3년 정도 언어치료를 받던 어느 날 아들이 말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치료사는 더 이상 아들에게 자신이 해 줄 게 없다며 놀이 선생님을 소개해 줬다.

그동안 나는 아이와의 전쟁을 피하고자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조기교실에 아들을 들여보내고 부모 교육과 복지관에서의 프로그램으로 오전을 보냈다. 오후에는 여러 가지 치료교육을 하러 아이의 기사로 하루를 보냈다.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하루 150 km를 운전한 날도 있었다.

부정기적으로 했던 치료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레게음악으로 청각 치료한다는 AIT(청각통합훈련)로 거금을 버렸고, 혀가 굳어 말을 못 한다고 그 어린 것의 혀를 가제 손수건으로 잡아 빼서 혀에 침을 놨던 무식한 행동을 엄마인 내가 나서서 했다. 부평에 있는 한의원은 온몸에 침을 놓아 부작용 없이 효과를 본대서 서른 개의 대침을 아이가 맞고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속울음을 했던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렇게 해야만 되는 줄 알고 나는 정말 부지런히 움직였다.

놀이치료 선생님을 만난 후 특수학교로 전학했다. 통합이 대세였던 그때 일반학교에 입학시키고 나는 비굴하게 선생님들에게 굽신거렸다. 허점 많은 아들을 맡아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 여긴 탓에 아들과 매일 등교하면서 배식은 으레 내가 할 일이 되었다. 가끔 배식 당번으로 우아하게 학교에 나오는 다른 엄마들과의 차별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아유, 승현이 어머니 오늘 배식 당번이구나, 고생 많으셨어요.”

담임은 눈웃음치며 다른 학부모에게는 고마워했지만 나에게는 한 번도 따뜻하게 수고했단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이런 수모쯤이야 내가 잘 받아넘기면 되는 거’라며 나를 다독였다.

일반 학교와 달리 특수 학교에서는 학부모를 대하는 교사들의 태도가 많이 달랐다. 비로소 나는 선생님들로부터 한 학생의 엄마로 인정받고 있었다. 뭔가 저지레를 했을 때만 관심 주던 일반학교와 달리 특수학교에서는 아이에게 맞는 자극과 교육이 제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치료실에서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도 그날 하루를 잘 생활하면 그게 다였다. 아들의 행동에 대해 걱정하면서 이런저런 방법을 의논했지만 엄마로서 힘든 부분까지 학교 선생님과 나눌 수는 없었다. 내 아이뿐 아니라 다른 아이로도 힘들어 보이는 선생님을 귀찮게 하지 말자는 생각에 모든 것은 오롯이 내가 짊어져야 할 아들의 무게로 여겼다.

돌이켜 보면 나의 지난한 방황은 나를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멘토의 부재에 기인한 것이었다.

놀이치료 엄샘의 단호함은 나를 이전과는 다른 엄마로 만들었다. 그 분에게 피교육자는 아들이 아니라 엄마인 나였다. 아들에게 가하는 많은 치료교육을 끊고 집에서 아들과 지내는 방법부터 알아가자고 했다. 그럼에도 10여 년간 해 오던 많은 치료교육(음악, 미술, 언어, 인지, 감각통합 등)을 중단하려니 불안했다. 딱히 그것으로 아이가 좋아진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더 나빠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믿음직한 엄샘은 모든 치료교육을 과감하게 끊을 수 있도록 지지했다. 운동은 필수니 오후에 두어 시간 운동하는 것만 계속했다. 다행히 체육센터 원장님도 모든 중심에 우리 아이들을 둔다는 철학이 있는 분이라 마음이 놓였다.

엄샘은 우리 모자가 집에서 그냥 가만히 있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집에서 차분하게 잘 지내야 이웃 마실도 가고 친인척 대소사에도 가는 것이야말로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이라 했다. 밖으로만 나도니 아이도 산만하고 엄마도 아이와 함께하면서 서로를 아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거였다.

가장 먼저 나는 아들을 기다려주기로 했다. 폭탄 맞은 집이 되어도 아이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조용히 치웠고 그동안 하던 모든 학습은 집에서도 하지 않았다.

아들이 한결 편해진 듯 보였지만 자기 머리를 때리는 자해와 알 수 없는 울음으로 세상 떠나갈 듯 울어대는 것은 매일 이어졌다. 자해와 울음을 둘 다 하는 날은 최악이었고 하나만 하는 날은 차악인 날들이 불안하면서도 잘 지나가고 있었다. 그나마 내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엄샘과 끊임없이 아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멘토였던 엄샘의 인연은 그분이 독일로 가게 되면서 끝이 났고 이어서 다솜체육센터 권샘이 자연스럽게 두 번째 멘토가 되었다. 특수교육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아이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아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의논할 수 있는 고마운 멘토였다.

월 1회 1박 2일 캠프를 했기에 아들이 거길 가면 그날은 비장애 딸아이와 종일 함께 했다. 동생이 없는 이틀 동안 오롯이 엄마를 차지한 딸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남편은 아들이 캠프에서 뭘 하겠냐며 보내지 말자고 했다. 그때 권샘은“아버님이 이틀 동안 하진이와 캠핑보다 더 재밌고 유익하게 보내실 수 있다면 하진이 캠프 데려가지 않겠습니다.”

남편은 바로 꼬리를 내렸고 권샘에 대한 신뢰는 더 커졌다.

학교 선생님이 하진이가 약을 먹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도 “하진이가 약 먹을 정도면 00학교 학생들 거의 다 약을 먹어야 되는데요. 일시적인 현상이니 조금만 더 두고 보자고 선생님께 말씀해 보세요.”

그렇게 내가 힘든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아들의 10대는 그렇게 엄샘과 권샘 덕분에 힘든 시간을 잘 버틸 수 있었다.

학령기를 마친 아들은 여전히 자해와 울음이 그치질 않았다. 빈도와 강도가 줄긴 했지만 외출도 쉽지 않았고 집에서의 생활도 상동행동이 심해서 서로 얼굴 붉히는 날이 많았다.

23세 되던 해 지인의 소개로 호호샘을 만났다. 그분 곁에서 나를 자극하고 실행하도록 이끈 정현샘, 이 두 분이 나와 아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말로만 듣고 아들에게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자기결정훈련’을 호호에서 시작했다. 아들이 누군가와 마주 보고 앉아서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인 건 처음이었다. 친구들과 조력자 선생님이 활동하는 동안 나는 호호샘과 정현샘의 지도를 받았다. 아들이 집에서 했던 행동에 따른 조언을 듣고 나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상동행동 보는 게 너무 지겨워서 그것을 안 하도록 하고 싶었으나 행동치료에서 상동행동은 영원히 갖고 살 수도 있는 문제라는 말에 마음을 내려놓았다. 안 되는 일에 너무 마음 쓰다 보면 다른 일도 그르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대신 너무 관여하지 말고 모른 척 하라는 말을 새겨듣고는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 나를 다독였다. 눈과 귀에 거슬리는 행동을 외면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 내공의 힘이 필요한지 그때 알았다.

아들의 상동행동은 여전하지만 수년간의 외면으로 그냥 보고만 있도록 내성이 생겼다. 그것이 자해나 타해는 아니므로 봐 줄 수 있는 건 다행이었고 아들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변한 것임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20년 넘게 통제 속에서 살던 아들은 호호를 통해 자신의 호불호를 잘 표현하게 되었다. 언어로 표현하기보다 적절한 표정과 단 한마디 ‘따아!’라는 걸로 예스와 노를 알아차려 대응하니 과격한 행동이 줄었다. 간헐적으로 보이던 자해와 서글픈 울음도 막을 내렸다. 그 두 가지만 안 해도 나는 살 것 같았다.

7년 정도 먹던 정신과 약도 끊었다. 병원보다 정현샘의 격려로 가능했다. 약의 효과가 없는 것 같아 끊어 보자고 했을 때 병원은 안 된다고 했지만 양을 줄여가며 아들 상황을 잘 체크해 보라고 한 건 정현샘이었다. 혼자였으면 불가능했던 일을 정현샘의 지지가 있어 과감하게 시도하고 성공할 수 있었다. 약 끊은 지 4년차 되었지만 아들은 편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최근 우리 발달장애 자녀 부모들을 슬프게 하는 사건 사고들이 잇달아 발생했다. 아들을 안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딸을 살해하고 자신도 생을 마감하려는 등 극단적 선택의 기사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과거의 자신이라는 성인 엄마들과 미래의 자신일 거라는 어린 엄마들로 나뉘었다.

앞서간 엄마들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마음을 나눌 멘토가 없었음이 안타까웠다. 배우자가 없는 경우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지지하고 공감해 주는 ‘사람’의 부재가 원인이란 생각이 든다.

나 역시 아들 유년기에는 남편이 지방에 근무했고 치료사들은 많았지만 나를 이끌어 줄 멘토는 없었다. 그래서 극한 생각에 사로잡혀 교통사고라도 났으면 싶은 마음이 들 때는 1차선으로 운전하며 상대편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 나에게 돌진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비장애 딸아이를 보면서 정신을 가다듬곤 했다.

우리 부모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멘토, 멘티가 되는 것도 좋지만 자칫 내가 너무 힘든데 남의 상황까지 들어야 하는 건 이중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지역의 장애인가족지원센터가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전문 상담사를 배치하여 자칫 우리 부모들이 가볍게 여기는 중요한 부분들을 짚어주는 멘토링 사업을 체계적으로 해주면 좋겠다.

과거의 힘든 얘길 웃으며 할 수 있게 된 우리 가족은 평범한 일상을 잘살고 있다. 오롯이 나 혼자 한 게 아니라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멘토가 있어서 가능했다. 코로나도 점점 정리되어 가는 즈음에 오프라인에서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멘토와 멘티가 만나 짧은 순간이나마 크게 웃고 그 웃음으로 하루를 잘 견디는 일상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더인디고 THE INDIGO]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 행복을 나누면서 따뜻한 사회를 바라봅니다.

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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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na@naver.com'
famina
5 months ago

많은공감과 울림있는글입니다
이렇게 나눠주시니 후배엄마들에게
도움이 많이 될거라는 기대가 됩니다.

상동행동은 문제라기 보다는 언어이기도 하고 불안을 낮추는 수단이기도 하고 놀이이기도 하고 반항(^^?)이기도 하죠 그때마다 다르니 …보기싫다고,
티난다고 엄마로서 괴로웠던 기억이
있네요^^;;

좋은글 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모두 몸건강.마음건강하시길…

cooksyk@gmail.xn--com-2m7ll84fw2z'
김서영
5 months ago

선생님의 지나온 나날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고 인내와 사랑으로 자식을 기르는것이 가장 효율적인 육아라는 사실이
비단 후배 장애부모에게 교감이 될 뿐만 아니라 비장애 엄마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어서 퍼 날랐습니다

away2007@hanmail.net'
박수경
2 months ago

지금 알게 된 것을 그 때 알았더라면..
이 글도 위로와 공감을 주는 멘토의 목소리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