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잡썰] 언어를 빼앗긴 약자들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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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가난을 도둑맞았던 약자들은 이제 구호로만 남은 알량한 언어마저 빼앗기고 있다. ⓒ픽사베이 재편집
▲오래전 가난을 도둑맞았던 약자들은 이제 구호로만 남은 알량한 언어마저 빼앗기고 있다. ⓒ픽사베이 재편집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장]

약자들이 언어마저 빼앗기고 있다.

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장

투쟁, 보장, 권리, 연대 등 강자에게 향하는 약자들의 구호를 또 다른 약자들이 나서서 가로채기 시작했다. 이들은 권력을 대신해 약자들과 대립적 전선을 펼치고 서로 연대하면서 불편을 권리침해로, 약자 배려는 역차별로 규정하고 공격에 나섰다. 차별금지를 주장하면 역차별을 이야기하고, 생존권을 요구하면 학습권을 보장하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대중교통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시위하자 이들은 강자를 대신해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하지 말라며 비아냥대고, 지하철 연착만 되면 장애인들의 시위 때문이라며 시도 때도 없이 긴급문자를 보낸다. 흥미로운 점은 약자들의 언어는 맥락 없는 과격한 구호로만 표현되는 것과 달리 이들의 언어는 메시지가 되어 미디어의 해석을 통해 권위를 쉽게 획득한다는 점이다.

약자들은 진작에 강자들에게 가난을 도둑맞았던 떠름한 기억이 있다. 작고 오종종한 출판사에서 편집일로 호구를 연명하던 때였다. 출판사에 무시로 들락거리던 인쇄소 사장이 내게 자신이 잘 아는 졸부가 한 사람이 있는데 혹시 자서전을 대필해 줄 수 있는지 넌지시 물어왔다. 원고료는 제법 두둑하게 챙겨줄 테니 한 번 해보라는 거였다. 인쇄소 사장이 제안한 글 값은 석 달 치 월급이었고 한 달 벌어 겨우 입에 풀칠하던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재에 밝아 돈놀이로 을지로 일대 올망졸망한 건물 서너 채를 소유하고 있다는 그는 눈매가 얇고 하관이 빠른 날카로운 인상의 60대 중늙은이였다.

“지지리도 고생스러웠던 내 인생을 얘기하자면 석 달 열흘도 모자란다니까!”

하지만 그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무용담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바닥을 드러냈다. 한국전쟁이 막 끝날 무렵 태어났다는 그의 삶은 지나치리만큼 평탄해서 자서전으로 엮을 그럴듯한 에피소드조차 마땅치 않았다. 더구나 그는 ‘빈곤’과 ‘창피함’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는데, 이를테면 초등학교 시절 육성회비를 기한을 넘겨 내는 바람에 선생에게 치도곤을 당한 ‘창피함’을 얘기하면서 돈이 없어 육성회비를 못 내는 ‘빈곤’으로 과장했다. 또 한 살 터울의 형에게 교복과 교과서를 대물림했다든지 도시락 반찬으로 자주 김치를 싸갔던 학창 시절을 얘기할 때에는 짐짓 짙은 한숨을 토해내기까지 했다. 게다가 돈 떼먹고 달아났던 채무자를 붙잡기 위해 밤잠을 설치며 수소문했던 일을 고생담으로 늘어놓기도 했다.

난감한 노릇이었다. 어찌어찌 원고지 800매 분량의 초고를 겨우 써서 보냈지만 예상대로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너무 밋밋하다는 거였다. 그럴듯한 클라이맥스가 없이 평탄한 이야기여서 읽는 내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거다.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느냐는 내 반문에 그는 답답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되물었다.

“거참… 내 자서전은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읽을 내 이야기란 거 몰라요?”

자신의 평탄했던 삶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성공담이기를 원했던 그의 바람은 오히려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그의 가난 훔치기는 조악한 자서전 안에 담길 어설픈 좀도둑질이지만, 노골적으로 약자들의 언어를 빼앗는 행위는 계급적이고 폭력적이어서 약탈에 가깝다. 권력의 대행자로 나선 이들의 전략은 약자의 언어로 약자를 공격함으로써 약자의 언어를 오염시키는 것. 그래서 서로를 의심하고 혐오하게 함으로써 누구랑 싸워야 하는지 모호하고 흐리게 하는 것이다.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약자들은 마침내 지쳐 싸움을 포기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이들의 ‘언어 빼앗기’ 전략이 성공을 거둔다면 또 다른 자들이 약자들의 언어를 빼앗기 위해 나설 것이고 어쩌면 이제 약자들의 자서전은 구호조차 없는 텅 빈 공책으로 남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모골이 송연할 만큼 두려운 세상이다.

[더인디고 THE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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