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잡썰] ‘가둠’과 ‘보호’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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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둠’에 길들지 않으려는 태산이의 몸부림은 ‘인간의 관점’에 의해 번번이 묵살되었고 그 대가는 고립이었지만 자신이 살고 싶어 하는 바다에의 열망만은 잊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가둠’에 대한 성찰은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 Ⓒ 더인디고 편집
▲‘가둠’에 길들지 않으려는 태산이의 몸부림은 ‘인간의 관점’에 의해 번번이 묵살되었고 그 대가는 고립이었지만 자신이 살고 싶어 하는 바다에의 열망만은 잊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가둠’에 대한 성찰은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 Ⓒ 더인디고 편집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장

추정 나이 27살. 남방큰돌고래 태산이는 지난 2022년 6월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앞바다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남방큰돌고래 평균 수명이 40살 이상이라고 하니 태산이가 살아온 스물일곱 해는 지나치게 짧았다. 2015년 대법원의 결정으로 비좁은 사각 수조를 벗어나 제주 앞바다에 방사되었으니 고작 7년을 더 산 셈이지만 그토록 열망했던 바다에서 자유롭게 살았던 세월이었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위 주둥이가 5cm 가량 잘린 장애를 갖고 있던 태산이는 바다로 되돌아와서도 아래턱이 어긋진 기형이 있는 복순이와 늘 함께였다고 한다. 당시 신문은 발견된 태산이의 머리는 부패가 시작되었고 몸통과 지느러미는 온전한 상태였다고 전하고 있지만 죽음의 원인은 알 길이 없다고 전했다.

태산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한 사육사는 “바뀐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사람과 전혀 마음을 나눌 생각이 없었고 예민하고 겁 많은 성격”이었다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태산이는 소심한 성정 탓에 화려한 돌고래쇼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채 바다로 되돌아와 짧은 생애를 마쳤다는 의미겠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이다.

태산이는 단 한 번도 바다에서 비좁은 수조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았고, 냉동 생선을 얻어먹는 조건으로 돌고래쇼에 나서겠다고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바다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태산이가 드러낸 예민함은 죽음에의 공포 때문이었을 것이고, 수많은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수면 위로 몸뚱이를 솟구치지 않으려 했던 반항기는 ‘가둠’에 길들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을 지도 모른다. 죽음에의 공포와 길들지 않으려는 극한의 감정적 대치는 먹이마저 거부하려는 저항으로 이어졌지만, 한낱 동물이었던 태산이의 의지는 ‘인간의 관점’에 의해 번번이 묵살되거나 좌절되었을 것이다. 거부와 반항의 대가는 다른 돌고래들과 동떨어진 비좁은 수조에 갇히는 벌을 받았을 것이고, 인간들의 냉담한 외면이었을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써온 환경 논픽션 작가 남종영은 최근작 ‘동물권력’에서 인간이 동물의 노동을 지배하는 세 가지 방법을 규정한다.

첫째는 보살핌이다. 잠잘 곳을 제공하고 끼니마다 먹이를 준다. 그리고 아프거나 다치면 적절하게 치료해 준다. 이러한 일련의 보살피는 인간의 행동은 동물에게는 대가 없는 보호여서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를 알아보는 관계의 매개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압제(壓制)다. 즉 동물을 가두기 위해 울타리를 치고 감금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삐를 죄고 굶기기도 하며, 인간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두른다는 것이다. 그래도 통제가 되지 않으면 죽인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동물을 상대로 ‘밀당’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에게 노동시키기 위해서 어르고 달래면서 ‘협상’해야 하는 것이다. 친절하게 동물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으면, 비용을 지불하고 돌고래쇼를 구경하는 관중들 앞에서 태산이는 그 미끈하고 유연한 등을 활처럼 휘며 수면을 차오르지 않을 테고 인간은 그 대가로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종영이 규정한 동물지배의 방법인 보살핌과 압제는 인간의 이익 추구로 환원된다.

인간의 관점에서 동물의 ‘가둠’은 ‘보호’의 또 다른 이름이다. ‘보호’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치료해 주는 보살핌이지만 동물에게는 통제와 간섭일 뿐이고 압제와 협상을 위한 소리 없는 미끼일 뿐이다. 그래서 ‘가둠’은 사람에게는 ‘보호’였지만, 남방큰돌고래인 태산에게는 고립의 전조였고, 인간은 구원자가 아닌 통제의 주체였다. 마찬가지로 장애를 가졌거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장애가 심하다는 현상이 ‘가둠’의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은 ‘가둠’을 전제로 한 ‘보호’는 당사자가 아닌 사회를 위한 ‘보호일 수밖에 없으며, 누구도 누구의 구원자일 수 없다는 명징함 때문이다.

한때 미국과 한국, 중국 등에서 번성했던 돌고래쇼가 순식간에 사라진 배경에는 세 명의 조련사를 살해했던 시월드 돌고래 ‘틸리쿰의 저항’이 있었지만, 교감이 가능했던 존재를 가뒀다는 잔혹성에 대한 사람으로서의 각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같은 사람을 ‘보호’라는 구실로 ‘가둠’을 제도화하는 동물은 인간종밖에 없다는 성찰은 우리의 몫으로만 남은 셈이다.

[더인디고 yslee5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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