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못이 차지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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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내부 모습_사람들이 의자에 빼곡하게 앉아 있다. 사진=픽사베이
▲지하철 내부 모습_사람들이 의자에 빼곡하게 앉아 있다. 사진=픽사베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벽에 액자라도 걸 일이 있어 못을 박다 보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순한 궁금증이 있다. ‘아무리 얇은 못이라도 분명 차지하고 있는 부피가 있는데 바늘만 한 틈도 보이지 않던 벽 속으로 도대체 어떤 원리로 들어가는 걸까?’ 콘크리트 가루 조금이 튀기는 하지만 못이 들어간 굵기에 비할 만큼은 아니다.

어릴 적부터 해결되지 않던 그 궁금증이 얼마 전 지하철에서 한순간에 해결되는 사건이 있었다. 나와 아저씨가 앉아있는 그 사이에 분명 작은 틈이 있긴 했다. 두 사람이 딱 붙어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누군가 한 번쯤 앉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마른 체형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 도전을 실행으로 옮기기는 어려웠다. 하나같이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는 겨울철엔 더더욱이 그 자리를 자신의 자리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보였다. 나도 아저씨도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그 작은 틈을 조금 더 넓혀서 다른 누군가의 새로운 기회로 만들려고 고민했지만, 그러기엔 우리가 마주하는 반대편의 승객들과의 간격에 여유라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존재하는 작은 틈을 우리 둘의 여유 공간으로 메우기엔 또 그 틈의 너비가 만만하지 않았다.

‘누군가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조금 더 몸을 구길 것인가?’
‘이 작은 공간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지하철의 의자에 현실적으로 몇 명의 사람이 앉는 것이 적당할까?’라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는 동안 우리 사이의 애매한 공간은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채 정차하는 역의 이름만을 바꿔갔다. 수유역에서도 서울역에서도 사당역에서도 그 공간은 원래부터 그런 여분으로 존재했던 듯 누구에게도 점유되지 않은 채 그 존재 그대로 우리 사이의 애매한 간격으로 남아있었다.

동작역을 출발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열차가 동작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오고 잠시 문이 열렸을 때 우리는 예상 못한 상황을 마주했다. 한동안 틈으로만 있을 것 같던 그 공간보다 몇 배는 더 클 것 같은 한 아주머니께서 그 자리에 앉으려는 시도를 시작하셨고, 그것은 특별한 어려움 없이 성공으로 이어졌다. 아무도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것이 언젠가부터 당연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자리를 차지한 아주머니의 모습 또한 그 시간 이후로 또 다른 자연스러움이 되었다.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한순간을 기점으로 “가능함”이 되었고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듯 순식간에 자연스러움이 되었다.

물론 누구나 예상하는 바와 같이 그 시점 이후로 아저씨와 나를 비롯한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굉장한 압력을 견뎌야 했다. 우리는 몸을 반쯤 잘라내지도 않았고 좁은 자리를 넓히기 위해서 별도의 노력 같은 것은 하지 않았지만, 한 사람의 추가적인 편의를 허용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답답한 압력을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콘크리트 벽에 박혀 있는 수많은 못도 그 공간의 이전에 존재하던 물질들의 작은 양보와 합의들로 새로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못의 굵기가 가늘면 얇은 대로 굵으면 굵은 대로 벽을 이루고 있던 콘크리트들은 새롭게 공간을 차지하려는 못에 특별한 불평 없이 몸을 구겨서 그만큼의 자리를 허용했다. 벽에 옷이 걸리고 예쁜 액자가 부착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양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떠한 사람의 불평도 없었던 지하철의 빡빡한 의자도 그랬고 내가 차지한 수많은 새로운 위치와 공간들도 어쩌면 그러했을 것이다.

새해가 되고 우리는 또 다른 기회와 공간들을 마주할 것이다. 그 자리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전에 없던 행복을 찾고 그것들은 원래부터 당연히 그랬던 것인 듯 느끼겠지만 못에 자리를 양보한 콘크리트처럼 몸을 구긴 채 몇 정거장을 함께한 승객들처럼 우리는 모르는 사이 배려와 희생의 덕을 보고 있다.

처음부터 지금 같았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를 위해 본래부터 비어 있던 공간 같은 것도 없다. 못을 박는 것도 지하철 자리에 앉는 것도 당연한 것 같지만 그냥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새로이 얻게 된 무언가가 있다면 나를 위해 몸을 구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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