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오늘의 메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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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와상과 커피 ⓒ픽사베이
▲크로와상과 커피 ⓒ픽사베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점심으로 같은 급식을 먹는 우리 학교 학생들의 매일 궁금증은 ‘오늘의 메뉴’이다. “오늘 메뉴가 뭐야?”라고 물으면 애플리케이션이나 홈페이지를 빠르게 검색한 어떤 친구가 “제육볶음이야!”라든지 “우동이야!”라고 말하며 활짝 웃기도 하고 “청국장이야!”, “콩밥이야!”라면서 우울해하기도 한다.

역시나 오늘도 “오늘 메뉴가 뭐였지?”라는 물음이 나오자마자 두 녀석이 동시에 메뉴 발표를 한다. 그런데 둘의 입 밖으로 나온 결과물이 일치하지 않는다. 한 학생은 생선가스라고 하고 또 다른 친구는 감자탕이라고 한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긴 한데 보통은 둘 중 한 명이 “맞다! 그건 내일 메뉴였지.” 하는 식으로 조정이 되는데 오늘은 둘 다 자기의 기억이 정확하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같은 메뉴, 같은 식탁을 공유하는 나도 궁금증 한껏 가지고 방문한 오늘의 식판 주인공은 감자탕과 생선가스 둘 다였다. 생선가스 좋아하는 녀석은 생선가스만, 감자탕 좋아하는 녀석은 감자탕만 생각하느라 다른 메뉴들을 읽었지만, 안 읽은 것처럼 기억에서 지워져 버린 거였다. 메뉴에는 아삭 고추 된장무침도 있고 포기김치도 있고 간식으로 바나나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두 녀석의 관심 밖에 있는 것들이라 한꺼번에 아웃포커싱 되어버린 상태였다. 다행히 두 녀석 모두 각자 좋아하는 반찬에 집중하느라 오전의 작은 다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리고 오늘의 식탁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주관이 관여된 새로운 창작물일 때가 많다. 아이들 아닌 나조차도 내가 좋아하는 육식 위주로 기억하고 나머지 음식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거나 아예 기억에서 지워지기도 한다. 어릴 적에도 그랬다. 친구들과 다투고 선생님께 혼이 날 때에도 분명 다툼의 원인은 친구에게 있다고 기억하고 확신하고 호소했지만 그건 상대 친구의 기억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누구의 기억력이 더 좋은지는 그런 상황에서 크게 중요한 변인이 되지 못했다. 각자에게 불리한 장면은 지워내고 유리한 장면은 부풀려서 빠른 속도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실재했던 것이라 믿었다. 의도하거나 의지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주관이 개입한 기억의 포토샵이 이루어졌다. 목격한 다수 친구의 증언은 대체로 일치했지만, 그것마저도 나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라고 느껴질 만큼 내 기억의 왜곡은 확고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작은 다툼 때에도, 접촉 사고의 현장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제시하는 확실하다는 증거들도 같은 상황에서 같은 경험을 나눈 사람이라고 보기에 어려울 만큼 극단적인 반대를 향한다. 내가 보기에 그것들은 의도되지 않은 본능적 왜곡일 때가 더 많다.

아름다운 기억들도 마찬가지로 각색되고 편집된 채로 각자의 추억으로 저장된다. 오래전 둘만의 여행이나 데이트를 떠올리는 아내와의 다정한 대화에서도 둘의 기억은 100%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 대화는 대체로 기분 좋지만, 기억의 왜곡은 때때로 “오빠! 거긴 누구랑 갔다 온 거야?”로 살벌한 엔딩을 가져오기도 한다.

난 기억력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내 기억을 100% 확신하지는 않는다. 그 언젠가 내게 큰 상처를 남겼던 누군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 미화된 기억으로 남았고 눈물 나도록 고마웠던 은인의 기억도 많이 무뎌진 채로 희미해졌다. 온몸이 전율하도록 기뻤던 어느 날도 세상이 끝날 것만 같았던 실명의 날도 지금 떠올릴 때 큰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내가 마음의 그릇이 커진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보다는 나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 기억의 편집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같은 상황을 마주한다면 난 또다시 그때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낄 것이다. 다듬어지고 무뎌진 기억 덕분에 웃으며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오늘도 많은 사람과 기억에 의존한 대화를 나누고 웃기도 하고 다투기도 한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경험을 나누지만 우리는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관심 가지는 것도 인상 깊은 것도 모두 다르기에 서로 다른 기억을 남기고 또 각색한다.

“난 기억력이 좋거든. 내 기억은 정말 확실해!”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좋은 시절 즐거운 시간을 사진으로 영상으로 남길 때에도 예쁘게 보정하고 잘라내고 편집하는 것처럼 각자의 기억은 각자 그렇게 간직하면 된다. 감자탕을 기억한 아이는 감자탕을 맛있게 먹고 생선가스를 기억한 아이는 생선가스를 맛있게 먹는 것처럼 말이다.

방금 놓아둔 물건의 위치도 찾지 못하면서 자신의 기억을 맹신하지 말자. 무뎌지면 무뎌진 대로 달라지면 달라진 대로 기억은 그저 각자의 머릿속에 각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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