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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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e gonna be okay. (넌 괜찮을 거야.)라고 쓰여 있는 이미지 ©unsplash
▲You're gonna be okay. (넌 괜찮을 거야.)라고 쓰여 있는 이미지 ©unsplash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어릴 적 친구들과 다툴 때마다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최종명령이 있었다.

“승준아! 미안하다고 하거라.“

“철수 너는 괜찮다고 해야지.“

때로는 쌍방과실로 인정되어 양쪽에 “미안해” 지시가 떨어진 적이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결론적으로는 “괜찮아”로 마무리되어야 했다. “How are you?”가 나오면 반사적으로 “Fine, thank you. And you?”가 나오는 것처럼 “미안해”와 “괜찮아”는 선생님의 머릿속에 한 세트의 숙어처럼 들어있는 듯했다.

사건의 발단은 늘 상대에게 있고 나와 그사이의 과실 비율은 0:10이라고만 주장하던 꼬맹이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는 정말 어려운 과제였지만 그보다 더 난감한 것은 괜찮다고 인정하는 것이었다.

저 녀석만큼은 아니어도 일정 부분 내 잘못도 있다고 생각하면 “미안해” 정도는 수긍할 수 있는 합의점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건 현장 바로 그곳에서 사과의 말 한마디로 괜찮아지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내 맞은편에서 콧김 씩씩거리며 어색하게 악수하던 철수도 내 상태와 별반 다름없는 게 분명했다.

자신의 감정을 속이는 거짓 “괜찮아”의 강요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다른 선생님을 만나도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다툼이 벌어질 때마다 내려지는 가혹한 데자뷔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동생과 다투었을 때 어머니도 그랬었고 어느 교통사고 현장에서 싸우시던 기사님들 중재하던 경찰 아저씨도 그와 비슷한 대사들을 다툼의 마무리 과정에서 요청하셨다.

수많은 다툼과 그때마다 내려진 세뇌의 작업 때문인지 언젠가부터는 선생님이 계시지 않아도 난 다른 이와의 충돌 뒤에 “미안해-괜찮아” 콤보를 시행했다. 나를 상대하는 그들도 나와 같은 교육을 받았음인지 내 “미안해요” 뒤에 자연스럽게 “괜찮습니다.”를 붙여주었다. 대사는 존대어로 조금 더 공손해지고 어떤 이는 “제가 오히려 미안하죠.”라는 보다 적극적인 화해의 의사를 표현하기도 했지만 괜찮다는 말 한마디로 당장 괜찮아지지 않는 건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다만 신기한 건 “괜찮아요.” 하는 순간 우리의 싸움들은 놀랍게 종료되었다는 것이었다. 남아있는 앙금이야 어쩔 수 없지만 더 이상 소모적인 다툼을 지속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소득이었다. 도로 위 교통사고처럼 사람들 사이의 충돌도 일방적 과실인 경우는 거의 없다. 어떤 의견이 한쪽의 놀라운 언변으로 설득되어버린다거나 양측이 인정하는 정확히 중간지점에서 합의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좋지 않은 상황들은 어느 시점에서 마무리되어야 하고 그것은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선언해야만 가능하다. 또다시 다투고 또다시 충돌하겠지만 다음 관계를 위해서 일단 우리는 괜찮아야 한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일 중 죽어도 괜찮지 않을 일 또한 그리 많지 않다. 당장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괜찮아지기도 한다.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정말 괜찮아서 괜찮다고 하란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괜찮아지겠다는 선언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괜찮다고 스스로 주문을 걸라는 것이기도 했다.

“괜찮아”는 선언이자 주문이었다. 세상일 중 무 자르는 것처럼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 모양으로 해결되는 것은 생각보다 드물다. 억울하고 불만족스럽더라도 어느 시점에 우리는 괜찮다고 선언해야 한다.

다툼에서도 그렇지만 내가 받는 월급 액수도 나의 관계들도 나의 위치도 내 장애마저도 괜찮지 않지만 괜찮아야 한다. 그래야만 괜찮을 수 있다. “보이지 않아서 너무 불편하고 답답해!”라고 말해도 “시각장애인이지만 대체로 괜찮아.”라고 말해도 내가 가진 신체적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선생님 앞에서 잘잘못을 끝까지 가려보겠다고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도 그 상황을 크게 바꿔놓지 못한다.

“괜찮다”라는 선언과 주문을 외우는 것은 많은 상황 속에서 우리의 최선이 된다. 유관순 누나나 이순신 장군처럼 목숨 바쳐 굽히지 않고 지켜내야 할 것들은 현실에 그리 많지 않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면 대체로 괜찮아진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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