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탈시설 장애인들의 죽음이 전유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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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시설 장애인들의 죽음이 전유되는 방식
▲이정훈 편집장은 한국의 탈시설 논의는 전유와 재전유가 거듭되면서 찬성과 반대의 양립된 각자의 주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고 지적한다. 이는 탈시설 정책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장애인의 탈시설은 국가의 주도적인 결정과 정책 의지에 달려 있다면서, 지역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는 탈시설 장애인들이 어둠 속에 살아가지도 않도록 꼼꼼하게 살피기를 당부했다. ⓒ unsplash
  • 시설 밖 지역사회에서 살다 가신 탈시설한 장애인을 생각하다
▲이정훈 에큐메니안 편집장

‘전유(專有, Appropriation)’라는, 주로 문학비평과 철학에서 사용되는, 뜻이 잘 와닿지 않는 단어가 있다. 일반적인 어법은 ‘자기 혼자만 사용하기 위해서, 흔히 허가 없이 무언가를 차지하는 일’을 가리킨다. 문화연구 분야에서는 ‘어떤 형태의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을 소유해 그 문화자본의 원(元) 소유자에게 적대적으로 만드는 행동’을 가리킨다. 그렇기에 무엇인가를 전유한다고 했을 때는 원본을 뒤집어 엎을 때가 다수이다. 그렇다고 전유가 꼭 전복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잠시 옆길로 빠져보자. 앞서 언급한 문화자본이란 ‘사회적으로 물려받은 계급적 배경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지속적인 문화적 취향’을 의미한다. 1970년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와 ‘장 클로드 파스롱(Jean-Claude Passeron)’이 《Reproduction in Education, Society and Culture》(1977)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특히 부르디외는 ‘아비투스(habitus)’라는 단어로 더욱 정교하게 개념화했다. 문화자본에 대한 또 다른 의미로는 자본을 문화산업에 집중한 거대 미디어 기업을 지칭하기도 한다.

또한 전유의 관련어에 해당하는 ‘재전유(re-appropriation)’는 문화연구에서 더욱 중요하게 쓰인다. 재전유는 ‘재의미작용(re-signification)’, ‘브리콜라주(bricolage)’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한 기호가 놓여 있는 맥락을 변경함으로써 그 기호를 다른 기호로 작용하게 하거나 혹은 다른 의미를 갖게 하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문화연구자들은 자본주의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현 세계에서는 모든 대상이 생산 과정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정해진 운명대로 이미 상품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부르주아의 지배에 저항의 신호를 보내려면 하위집단은 상품을 소비하기는 하되, 그 상품이 시장에 나온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를 소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글을 쓰는 필자 자신도 잘 이해되지 않는 이론 이야기는 이쯤이면 된 것 같다. 이제 좀 더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를 해보자. 먼저 소위 복지선진국이라는 하는 국가들에서 제법 오랜 세월 쌓여 온 이야기 중 하나가 ‘장애인도 지정된 곳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은 낡은 사고이고, 지역사회에서 통합적이며 자립적인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고, 국가와 사회는 이를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장애인의 거주시설 수용 반대이고, 이미 장애인 거주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장애인은 장애인 거주시설로부터 나옴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장애인 거주시설로부터의 나옴, 즉 탈시설 담론은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발생하는 장애인에 대한 인권침해와 오랜 시설 수용 생활로 무기력, 의존성 등 많은 병폐들이 알려지면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되었고, 이에 따라 복지선진국은 이미 1960년대부터 장애인이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자립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전환해왔다. 심지어 장애인 거주시설 폐쇄 조치를 단행한 국가들도 늘어가고 있다. 여러 국가들에서는 탈시설이 보장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행 단계라고 하면 너무 후한 표현인 것 같기도 한데, 한국에서도 꽤 오래 전부터 탈시설 의제가 장애계의 이슈로 떠오르면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장애인 탈시설 정책이나 담론에 대해 정부나 지자체, 일부 장애 당사자 단체들의 강한 거부감이다. 정부나 지자체는 예산이나 빈약한 인프라로 인해 장애인 탈시설에 대해 난색을 표하는 것은 일정 부분 이해가 가능하지만, 장애인 당사자 단체나 부모 단체들에서 거부감을 드러내는 모습은 장애인 당사자로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다. 이러한 모습 자체가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이행기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썩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다.

여기에 특정 상황에 대한 전유와 재전유의 모습까지 겹치면서 장애인 탈시설은 더욱 복잡하게 돌아간다. 그 특정 상황은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탈시설한 장애인의 죽음에 대한 소위 권력과 일부 장애인 당사자 단체와 부모 단체들의 전유 방식이다. 전유나 재전유가 기존 담론의 배열과 배치를 뒤바꾸어 전복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을 재전유해 기존의 배열과 배치를 강화하는 쪽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지난 2022년 5월 전국장애인부모연대는 발달장애인 자녀의 삶을 부모가 직접 끝을 내고 자신도 비극적 선택한 사건들이 발생한 것을 두고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에게만 모든 짐을 지워서는 안 되고 인프라 구축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탈시설을 기본으로 탈시설 이후의 장애인과 그 가족의 삶이 버겁지 않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각 종단과 함께 추모 예식을 진행하며 종교계와 연대를 구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동일한 사건들을 두고 일부 장애인 당사자 단체나 부모 단체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탈시설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이들 단체들은 “탈시설은 헌법의 기본권인 거주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법을 재해석하기도 했다. 이를 취재한 한 언론은 이런 식의 헤드라인을 잡았다. “최근 장애인과 가족에게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인프라 구축 등 지역사회 기반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탈시설 정책을 강행해 가족들에게 책임이 전가된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렇게 탈시설에 대한 첨예한 논쟁이 벌어지자 정부나 정치권에서도 혼란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지난해 10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가 보건복지부를 상대로 국정감사를 진행한 자리에서 첨예한 찬반 논란의 장애인 탈시설 정책에 대해 국민의힘 중심으로 장애인 탈시설을 강제퇴소로 규정했고 지원주택사업에 대해 민관 유착으로 몰아갔다. 이러한 지적이 이어지자 보건복지부 한 관계자는 장애인 탈시설 전면 재검토 가능성을 내비쳤고, 탈시설 관련 협의체 구성에도 문제가 있는 것처럼 언급했다.

동일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과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나 우려의 목소리가 등장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반복적인 수사이지만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에 대해 한국 사회보다 먼저 탈시설을 구축해 나간 해외 사례들을 종합해 보는 것도 유의미할 것이다.

이른바 복지선진국의 탈시설 과정이 쉽게 이뤄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국가들에서도 장애인 탈시설 과정에서 복지 관련 노동자들의 반대가 극심했었고, 장애인 거주시설에서의 생활에 비추어볼 때 인프라 구축이 미진한 상황에서 지역사회가 불안정할 수 있다는 가족들의 걱정도 뒤따랐다. 하지만 이들 국가들의 장애인 탈시설 정책 성공 이면에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계획을 가지고 가족과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안심시켜 왔기에 가능했다. 결국 정부와 지자체가 어떤 담론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좀 더 싼 맛에 복지서비스 생색을 내려면 장애인 거주시설 운영이 가성비가 말도 안 되게 높다. 인프라 구축에는 오랜 시간과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어야 하니 그러하다. 하지만 장애인도 오롯한 주체이고 한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인정한다면 장애인 탈시설은 논쟁의 대상 자체가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겠냐 하는 실천적인 질문만 남게 되어야 한다.

오늘 경기도 인근 지역에서 생활하시던 탈시설 장애인 한 분이 소천하셨다는 기사를 읽었다. 장례비 마련도 어렵기에 연대를 당부하는 글도 있었다. 하지만 이 기사를 대했던 필자는 다른 모든 문제보다 이 탈시설 장애인 분의 죽음을 둘러싼 전유와 재전유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 우스갯소리로, 안 봐도 비디오 같았다. 누군가는 장애인 탈시설을 위한 사회적 인프라 구축을 촉구할 테지만, 또 누군가는 섣부른 탈시설 운동을 비판할 것이다.

고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지만, 탈시설해 지역사회에 생활했던 그 장애인 분은 자유로웠기에 좋았다고 말했을까, 살아가는 동안 너무 힘들었기에 탈시설이 후회된다고 말할까. 누구도 정답을 말할 수도 없고 고인을 빙자해서도 안 된다. 고인의 죽음에 대한 전유와 재전유 자체를 접어두고 고인 앞에 조용히 머리부터 숙이고 애도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그 다음은 탈시설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하되, 이미 지역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는 장애인들과 탈시설한 장애인들이 어둠 속에 살아가지도 않도록 꼼꼼하게 살폈으면 한다. 이들을 다시 장애인 거주시설로 돌려보는 것이나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하는 것은, 종교적 언어로는, ‘죄’에 해당할 테니까.

[더인디고 THE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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