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정의 정정당당] 가면증후군과 당사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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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쓴 얼굴 ⓒ픽사베이
▲가면 쓴 얼굴 ⓒ픽사베이

[더인디고=조미정 집필위원]

▲조미정 더인디고 집필위원
▲조미정 더인디고 집필위원

나는 가면을 쓰고 있다. 그 가면은 실제로 있는 가면이 아니라 나의 불안감이 만들어낸 가면이다. 가면증후군이란 자신의 업적이 운에 따른 것이거나 사기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는 믿음 아래, 그러한 사실이 탄로 날까 봐 걱정하는 심리적 현상을 말한다.

나는 당사자단체 세바다 대표를 하고 있고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본업 역시 많은 성과를 거뒀다. 겉으로 보기에는 장애계에서 꽤나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티가 나는 장애인이 아니었기 때문에(invisible) 내가 가짜 장애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잠재우기 위해 내 몫의 복지카드를 유심히 들여다보거나, 나의 진료기록을 다시 읽으며 ‘역시 나는 장애인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걸어온 길 또한 운이 좋아서,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학원 한 번 안 가고 거점국립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도, 세바다 단체를 일으킨 것도, 1억이 넘게 지원금을 따냈어도, 칼럼과 토론문의 반응이 좋았어도 그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언어지능을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이 모든 게 탄로 나거나 내 능력이 사라지게 되면 나는 장애계에서 버려질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심정으로 일해왔다.

나의 지난 믿음처럼 정말 장애당사자계는 내러티브가 약한 당사자의 능력만을 착취하고 필요 없을 때는 버리는 곳일까?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이러한 생각들은 능력주의에 기반한 것이다. 장애계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능력이란 장애인으로서의 삶과 차별 경험을 언어로 풀어내는 능력, 장애운동과 당사자주의에 대한 정치적 감각, 회계, 행정, 디자인과 같은 실무적 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능력이 있다면 분명 운동의 효율이 좋아질 것이다. 그러나 능력주의의 피해자들이 모인 장애계에서 또 다시 능력으로 당사자를 재단하는 일이 온당할까?

실무적 능력은 논외로 치고, 경험을 풀어내는 능력부터 살펴보자. 경험을 풀어내는 것은 당사자 자신의 장애 내러티브를 표현하는 행위이다. 내러티브란 바로 장애인으로서의 삶과 차별에 대한 경험이다. 만약 장애계가 내러티브가 약한 사람을 배제한다면, 이것은 장애인으로서의 삶에 위계를 나누는 것이다. 당사자가 같은 당사자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이다. 당연히 당사자주의에 해롭다.

운동에 대한 정치적 감각은 어떤가. 대부분은 직감과 눈치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대부분의 신경다양인이 얻기 어려운 것이다. 정치적 감각이 부족하면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이라면, 대부분의 정신적 장애인 당사자는 당사자운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 역시 궤변이다.

무엇보다 장애계는 능력주의 그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 비장애중심주의의 영어단어는 ableism이다. able은 ‘능력 있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결국 비장애중심주의와 능력주의는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다. 장애인에게, 능력이 결여된 사람이라는 프레임-실제로 능력이 없는 당사자가 있음을 인정하더라도-을 씌우고 무능력자로 낙인찍는 것이 바로 에이블리즘, 비장애중심주의이다.

결국 나의 가면증후군은 장애인에게 요구되는 능력주의적 편견을 내면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당사자가 능력주의를 내면화하게 될까?

당사자단체를 운영하다 보면 갖가지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는 후원금 모금이다. 사업비는 지원받더라도, 단체 운영비를 벌기 위해서는 회비나 후원금을 모아야 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없으면 실현하기 어렵다. 특히 후원금은 숫자로 찍히기 때문에 실적을 계산하기 좋다. 실적이 숫자로 환산되면 목표치를 채워야 한다는 압박에 빠지기 쉽다.

둘째로 보조금과 지원금이 있다. 장애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비영리단체는 사업비를 자력으로 마련하기 어렵다. 따라서 정부나 민간 재단의 지원을 받게 된다. 이들 기관의 지원을 받으려면 사업계획서(proposal)를 써야 한다.

당사자단체가 제출한 사업계획서는 다양한 기준으로 평가된다. 사업의 구체성, 실현가능성, 창의성, 파급력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다시 숫자로 환산되어 심사서류에 기록된다.

서류에 통과한다면 면접을 보게 된다. 정부나 민간기관은 당사자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기관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프레젠테이션과 질의응답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고, 현장에서도 의심 섞인 질문에 시달린다. 스트레스가 막심하다.

사업을 따낸 후에도 안심할 수 없다. 중간보고서와 결과보고서가 그것이다. 이들 보고서에는 사업의 실적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야 한다. 만약 실적이 좋지 않거나 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한다면 공모에 탈락되는 것보다도 못한 불이익을 겪게 된다.

결국 성과주의적 배분체계가 장애 당사자단체를 실적으로 압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영리단체는 실적으로만 평가하기 어려운 공익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장애인단체를 성과로 평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당사자단체는 능력주의와 실적주의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결국 나의 가면증후군은 편견의 내면화라는 단순한 심리적 작용이 아니라, 당사자단체에 능력주의와 성과주의를 강요하는 현실이 반영되어 있는 사회적 현상이다. 이것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그렇다면 가면증후군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있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순수한 후원금만으로 단체를 운영하거나 아예 성과주의를 혁파하는 것이지만, 실현가능성이 낮다.

대신 성과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꾸준히 지적하고, 단체가 능력주의에 물들지 않도록 서로를 보듬고 더 나은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만큼 당사자단체가 성과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려워보인다. 이러한 부조리를 없앨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정신적 장애인의 당사자주의는 아직 미약하다. 정신적 장애인이 정말 당찬 당사자주의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미약한 당사자주의가 창대해질 수 있도록 자그마한 글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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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36459a33802@exam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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