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정의 정정당당] 내면화된 능력주의를 타파하는 우리 모두의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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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로 바쁜 모습 ⓒ픽사베이
▲업무로 바쁜 모습 ⓒ픽사베이

[더인디고=조미정 집필위원]

▲조미정 더인디고 집필위원
▲조미정 더인디고 집필위원

하늘에 먹구름이 낀 날이었다. 좋지 않은 날씨만큼이나 그날 당사자단체 활동가들의 기분도 좋지 않았다. 정규 활동가 세 명이 거의 모든 사무를 처리해야 했다. 나 역시 그날따라 필요한 걸 빠트린다거나, 실수를 하는 날이 많았고 평소보다 작업속도가 느렸다.

당면한 일을 쳐내는 것이 힘겹게 느껴질 때쯤, 다른 당사자 활동가 한 분께서 속상한 마음을 이야기하셨다. 자신은 언어지능이 낮아 언어로 하는 대부분의 사무를 처리하는 것이 느리고 잘되지 않는데, 다른 활동가들은 일이 많아도 잘하지만 자신만 못하는 것 같아서 쓰레기 같이 느껴진다고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이 쓰레기 같다는 말씀은 사실 놀랍거나 충격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놀랍고 충격적이고 슬펐다. 일을 못 하면 이용 가치가 없고, 이용 가치가 없으면 버려져야 한다는 잔인하고도 슬픈 논리구조는 나부터가 자신에게 휘두르던 칼날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말에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라든가, ‘ㅇㅇ님은 쓸모 있는 존재예요’라는 대답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하기에는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도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없으면서 다른 이에게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광경들은 비단 내가 있는 한곳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당사자가 모든 사무를 처리하는 단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어두운 면이다. 환히 빛나기만 해 보이는 달이 실은 영영 해가 들지 않는 뒷면을 품고 있는 것처럼, 당사자가 모든 일의 주도권을 쥐고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긍정적인 모습의 이면에는 비합리적인 업무 분담, 과도한 업무량 등의 문제점이 숨어 있다.

장애계에 입문하고 마인드포스트 기고부터 더인디고 ‘정정당당’ 시리즈까지 많은 글을 써오면서 내가 천착한 주제가 있다면 바로 ‘정신(적)장애와 능력주의’일 것이다. 비장애중심주의를 뜻하는 에이블리즘(ableism)부터가 능력주의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입 이후로 능력주의는 장애인에게 끈덕지게 따라붙었고 지금은 더 그렇다.

사회는 정신장애인의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증상 때문에, 체력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잠깐 쉬고 있으면 ‘연락 안 받고 있냐’, ‘지금 뭐하고 있냐’ 등의 핀잔 섞인 눈치가 날아온다. 전화 응대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해고하거나, 사회생활을 처음 경험하는 당사자들을 ‘기본도 안 된 당사자들’이라면서 비난하기 일쑤다.

그러나 당사자들을 무엇보다 괴롭게 하는 건 바로 내면화된 능력주의이다. 타인이 능력주의를 들어 자신을 비난하면 원망의 대상을 상대방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러나 능력주의를 휘두르며 자신을 아프게 찔러대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면? 거리가 가까운 만큼 상처는 더 커진다.

나는 지난 칼럼 ‘가면증후군과 당사자주의’에서 당사자들이 능력주의를 내면화하는 이유를 다뤘다. 오늘은 그런 생각이 들 때 당사자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1. 오늘 충분한 업무시간을 갖고 일했는가?

비장애인 기준의 업무시간이 아니라 정신장애인인 ‘나 자신’을 기준으로, 그 업무를 하기에 적합한 업무시간을 할당받았는지를 점검해 보자. 대부분의 정신장애인은 충분한 시간을 할당받지 못하고 시간에 쫓기며 일하게 된다. 시간이 부족하면 일을 심사숙고하지 못하므로 업무 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2. 오늘 충분히 쉬었는가?

과도한 업무를 하고 쉬지 못하면 누구나 몸과 마음에 병이 들게 마련이다. 하물며 정신장애인은 더하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은 휴식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의식적으로 컴퓨터를 잠그거나 일터에 말하고 잠시 쉬었다 오는 것이 필요하다.

3. 나의 업무가 다른 사람이 쉬이 대체할 수 있는 업무인가?

아주 단순한 작업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업무는 다른 직원이 쉽게 하기는 어렵다. 특히 그것이 회계나 행정 혹은 자격증이 필요한 고난이도의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특히 회계는 비장애인조차 힘겨워하는 일이다. 당사자인 자신이 그런 어려운 일들을 기꺼이 하며 잘 버텼다면 ‘쓰레기’가 아니라 ‘1인분을 성실히 하는 것’이다.

4. 객관적으로 업무량이 많지는 않은가?

직장인이라면 본능적으로 알 것이다. 자신의 역량에 비해 너무 많은 일들을 떠안고 있지는 않은지를 말이다. 업무량이 많다면 직장에 업무량 조정을 요청해야 한다. 너무 적게, 많이 줄이지도 말고 자신이 이 일을 심심해하지도, 힘겨워하지도 않을 정도의 범위 내에서 수월하게 할 수 있는 정도면 좋다.

업무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당사자에게는 위와 같이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해 보는 것이 좋지만,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합리적 조정(정당한 편의제공)이 필요하다. 정신(적) 장애인을 고용하고 있는 사업주는 당사자에게 충분한 업무시간을 부여함과 함께 역량에 적합한 내용과 양의 업무를 할당해야 한다. 당사자가 증상 혹은 체력 때문에 힘들어하면 충분히 쉬게 해야 한다.

당사자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거나 건의하기 힘들어하면 어떠한 조정을 제공할 수 있을까? 바로 근로지원인 서비스이다. 근로지원인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장애인 노동자의 업무를 분담하거나 도와주는 일만 해당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만, 근로지원인의 업무 영역은 다양하다.

정신(적) 장애인에게 근로지원인은 그날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차분히 알려주거나, 일하는 방법을 반복훈련 하거나, 더 나은 작업방식을 제안하고 업무환경을 개선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근로지원인의 가장 막중한 업무는 권익옹호이다. 장애인 노동자가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불법행위, 모욕, 성희롱 등을 당한다면 당사자가 말하지 못하더라도 그러한 부당행위를 제지할 수 있어야 한다. 피곤해하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휴식을 부여하고, 일이 너무 많거나 어려우면 업무 조정을 요청하는 활동을 통해 장애인 노동자가 평등하게 일할 수 있다.

근로지원인 서비스는 활동지원에 비해 허들이 낮고 지원 시간이 많아 정신장애인도 이용하기 좋지만, 안타깝게도 당사자 사이에서 많이 홍보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 글을 보는 당사자 여러분께서는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혹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삶에서 경험해야 하는 과정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벌을 선고하고 집행하는 가혹한 나날들은 절대 당연하지 않다. 합리적 조정이 있다면 장애인 노동자들이 더 이상 자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정신적 장애인의 당사자주의는 아직 미약하다. 정신적 장애인이 정말 당찬 당사자주의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미약한 당사자주의가 창대해질 수 있도록 자그마한 글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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