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형진의 이판사판] 물리적, 제도적 장벽을 넘어, 관계적 장벽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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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픽사베이
▲벽 ©픽사베이

[더인디고=안형진 집필위원]

▲안형진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형진 더인디고 집필위원

많은 뇌성마비인들이 경험했겠지만, 나 역시 식당이나 가게에서 천 원짜리 몇 장을 받고 쫓겨난 경험을 많이 했다. 새삼스럽게 그런 신세 한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숨어 있는 정의 윤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나처럼 호혜적인 느낌을 주지 못한 사람을 보면, 상대방은 아마도 “저 사람이 나한테 피해를 주지 않을까?, 위협은 가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먼저 할 것이다. 내가 저 사람과의 관계를 맺으면 상호 간의 필요한 것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라는 본능이 작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 사람이 저 사람과 나 사이에 필요한 공공의 이익이나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는 기능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느냐는 잣대가 작용하는 것이다.

사실, 장애운동은 장애인도 공공의 이익이나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를 바꾸어 나가는 투쟁의 과정이었다. 경사로와 엘리베이터만 있으면, 장애인의 손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활동지원제도가 있으면, 뭐만 있으면, 뭐만 있으면, 장애인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하면서 투쟁해 왔다. 그리고 이제는 그 범위가 물리적, 제도적 범주를 넘어, ‘관계적 범주’까지 말해야 하는 수준까지 오고 말았다.

우리는 그동안 장애인이 통합될 수 있는 환경과 정책이 뒷받침되면 관계적 장벽은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과연 그럴까? 물리적, 정책적 장벽이 해결되면, 나 같은 뇌성마비인이나 발달장애인을 있는 그대로 존엄하게 인정해 주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하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 볼 게 있다. “우리가 왜 공공의 이익에 기여해야 되지?”라는 질문이다.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공공의 이익이 누구의 입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를 잘 생각해봐야 한다. 시끄럽다고 어린이조차 안 받는 것이 공중도덕으로 되어 가는 사회정의에 ‘기여’하면, 뇌성마비인이나 발달장애인이 존엄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공공의 선 혹은 공공의 이익에 대한 장애인의 무조건적인 기여를 살짝 비틀어 볼 때, 관계적 장벽을 해결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새로운 정의관으로 호혜적 소통과 관계에 제약을 받는 뇌성마비인이나 발달장애인의 존엄한 삶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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