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혼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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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게임기를 조작하는 모습 ⓒ픽사베이
▲손으로 게임기를 조작하는 모습 ⓒ픽사베이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내 나이 또래 남자들이라면 다들 30여 년 전 오락실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어머니 야채 심부름 거스름돈 빼돌려서 오락하다가 현장 검거된 일, 학교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담 넘어서 대낮에 오락실 갔던 일 정도는 얌전한 스토리이고 조금 거친 녀석들은 라이터 개조하고 동전에 실 꿰어서 가짜 코인으로 오락기 동작시키는 사기도 치곤 했다.

‘보글보글’, ‘갤러그’ ‘더블드래곤’으로 출발한 나의 오락실 경력은 ‘스트리트 파이터’, ‘로얄 럼블’까지 10여 년 이어졌지만 단 한 번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라고 느껴본 적은 없다. 아빠 친구분들이나 삼촌, 이모가 놀러 왔을 때를 노려 한시적으로 너그러워지신 엄마의 후한 용돈과 허락을 받아낸 적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조금 더 긴 시간 했다고 느꼈을 뿐 만족스러운 퇴장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50원짜리 하나면 온몸 구석까지 흥분할 수 있었던 그곳은 나에게 만큼은 대형 놀이동산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천국이었다. 용량 1메가도 되지 않는 단순한 게임이 뭐 그리 재미있었을까 싶지만 내게 있어서만큼은 이후 출시된 어떤 화려한 패밀리 게임들도 오락실의 클래식 게임을 대체하지 못했다. 심지어 처음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 오락을 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할 정도였으니 난 거의 게임중독에 가까웠던 듯하다.

이런 내게 얼마 전 아주 특별한 장난감을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 생겼다. 동료 선생님께서 구매한 게임기는 아주 오래전 내가 다니던 오락실 게임기의 조이스틱 부분을 잘라서 온 것처럼 생겨있었다. 우리집 커다란 TV 화면에 케이블이 연결되자 화면 가득 게임 목록이 로딩되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읽어주는 리스트엔 내가 경험한 모든 게임이 내장되어 있었다.

18,000 종류의 게임 수록! 그 숫자를 생각하면 내 경험은 작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보글보글도 틀어보고 스트리트 파이터도 해 보았다. 보이지 않았지만, 손이 조작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시각장애인인 내가 당연히 게임을 엄청 잘할 수는 없었지만 오래전에 가지고 놀았던 것과 같은 촉감의 조이스틱을 이리저리 돌리고 눌러보는 것만으로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갔다. 더 솔직히 말하면 시작 화면에 나오는 배경음악과 효과음만 들어도 나의 심장은 흥분을 시작했다.

게임하고 또 하고 또 게임하고 또다시 게임하고 간식 먹고 게임하고 밥 먹고 게임했다. 어릴 적 게임을 하려면 동전 개수 세면서 어떤 것을 할지 고민해야 했지만, 버튼만 누르면 코인이 추가 되는 이 기계는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좋아하는 게임 대신 잘하는 게임을 해야 하는 기회비용 따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팔이 아프고 땀이 흐르고 체력도 떨어져 갈 때쯤 시계는 벌써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내가 어릴 적에 이런 기계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천국이 되는 기적이 나에게만큼은 매일매일 어렵지 않게 일어났을 것 같았다. 오늘만큼은 나를 저지하는 어른도 없고 동전 걱정도 없었다. 마침 방학이고 마음만 먹으면 밤을 새우고 또 다음날도 게임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내가 아닌 어린 나였다면 정말 끝을 모르고 눈이 벌게지도록 그 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조금 어른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체력이 떨어져서인지 나의 환락의 시간은 나름의 종료 시간을 만들었다.

어느 틈엔 난 어른이라 불리고 독립된 가정이 생겼다. 내겐 많은 자유가 주어졌고 나의 결정을 막아서거나 나의 행동을 멈추게 할 어른은 점점 줄어간다. 혼날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허락 맡을 것을 고민하지도 않는다. 멈추지 않고 오락해도 밤새 술을 마셔도 나쁜 행동이나 언행을 해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꾸짖어줄 이가 별로 없다.

오락이 어린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내겐 적당한 선이라는 것이 필요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어린 나에겐 그것을 스스로 지킬 만큼의 힘은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금 나에겐 그런 의지가 생겼을까? 난 어른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도 혼날 일을 많이 한다. 다만 다 큰 어른이기에 아무도 혼내지 않을 뿐이다.

집에 무제한 코인의 오락기가 있어도 난 어느 정도의 선을 지켜야 한다. 그것을 정해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이는 이젠 나 자신이다. 난 어른이지만 아직도 완벽하지 못하다. 더 절제해야 하고 더 혼나야 한다. 어른에게 게임기를 살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주어지는 것은 방종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마음대로 살라는 뜻이 아니다. 오늘도 실수투성이인 내게 난 스스로 꾸지람해야만 한다. 아무도 혼내지 않는다고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한다.

내가 오락실에서 살지 않고 학교도 가고 학원도 다녔던 것은 그렇게 하라고 알려준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짜 동전으로 남의 오락실 기계에 사기를 치지 않았던 것도 그러지 말라고 말씀하신 어른들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젠 내게 나 스스로 그런 어른이 되어 주어야 한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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