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정의 정정당당] 당사자 활동가여, 마음껏 절망하고 슬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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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빠진 사람의 모습 ⓒ픽사베이
▲절망에 빠진 사람의 모습 ⓒ픽사베이

[더인디고=조미정 집필위원]

▲조미정 더인디고 집필위원
▲조미정 더인디고 집필위원

당사자 운동을 하면서 나의 정신건강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요즘, 툭하면 우는 날이 많았다. 업무시간에도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출장 가서도 울고, 센터 대표님과 면담하면서도 울었다. 약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나의 감정선은 요동쳤다. 망상과도 같은 생각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칼럼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주제를 생각하고 또 지우기를 반복했다.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한 글자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마감 기한을 맞추지 못하고야 말았다. 글쟁이로서 나의 생명은 끝났구나 싶었다.

정신건강이 요동치는 원인은 하나였다. 내가 운영하는 단체 ‘세바다’ 회원분들 얼굴을 뵐 면목이 없어서였다. 사업을 하기 위해 사업제안서를 썼지만 떨어졌다. 동원력도 약해졌다. 로드맵을 썼지만 아직 배포하지 못하고 있었다. 못난 나 때문에 단체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면담 때 ‘세바다’를 살릴 방법에 대해 여쭤보았다. 대표님은 단체를 위해서라면 어느 순간에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하셨다. 장애 유형별로 분절되어 있는 지금의 장애계에서는 지원을 제대로 받을 수 없을 거라는 말씀도 하셨다. 절망스러웠다. 우리가 꿈꿨던 ‘통합된 신경다양성’ 단체로는 생존할 수가 없는 걸까.

대표님 앞에서 펑펑 울다가 단체의 진로에 대해 여러 조언을 듣고 면담을 마쳤다. 여러 솔루션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마음의 짐을 벗을 수 없었다. 무거운 기분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은, 당사자 단체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생존의 고통 속에 절망스러워하는 이유는 다 신경다양성 운동을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하고 싶어서는 아닌가? 신경다양성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마음이 다친 것은 아닐까?

2주 전, 요리하기 위해 대파를 썰다가 왼손 엄지를 크게 다쳤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함께 피가 멈추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니 봉합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파상풍 예방접종과 함께 부분마취를 하고 세 바늘을 꿰맸다. 그러니 신기하게도 피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곪은 부분 하나 없이 나은 상처는 실밥을 풀 날을 기다리고 있다.

당사자 운동에서 받은 상처와 절망도 마찬가지다. 내가 더욱 맛있는 요리를 하기 위해 열심히 파를 썰다가 다친 것처럼, 내가 신경다양성 운동을 지속해서 당사자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당사자의 힘으로 세상을 바꿔나가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다친 상처일 뿐이다. 더 큰 병으로 번지지 않게 예방주사를 맞고 세 바늘을 꿰매어 상처를 낫게 했듯이, 마음의 상처가 더욱 커지지 않도록 약을 잘 먹고 상담을 충실히 받고 나 자신을 돌봐야 하는 것이다. 내 마음의 실밥을 풀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마음의 치유와 함께 나도 ‘세바다’도 한층 성장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더는 절망스럽지 않았다. 대신, ‘세바다’가 성장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대표님이 제안하셨던 해법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떡볶이에 넣을 대파를 썰다 다친 이후로 한동안 만들지 않았던 떡볶이를 만들었다. 이번엔 다른 방법을 이용했다. 대파를 썰지 않아도 맛있는 육수를 만들 수 있도록 맛집에서 육수를 사 왔고, 어묵과 같은 부재료는 가위로 잘랐다. 모양은 조금 볼품없게 되었지만 나도 다치지 않았고, 맛도 있었다. 설거지는 한 손으로 할 방법을 생각해 내 말끔히 치웠다.

나도 ‘세바다’의 생존과 신경다양성 운동의 지속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손이 다치면 나머지 한 손으로 할 방법을 생각해 내면 되듯이, 동원력이 떨어지고 독립적인 사업을 하기 힘들다면 친목과 자조모임, 스터디 등 작은 부분부터 강화함으로써 다시 일어서면 되는 것이다.

당사자 운동을 하다 보면 많은 어려움과 스트레스,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절대 마주해선 안 될 장벽이 아니다. 성장을 위해서라면 직면하고 해결해야 하는 과제일 뿐이다. 절망에서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 당사자 운동에 필요한 통찰(insight)을 배우고 체화할 수 있게 된다. 더욱 성숙한 당사자 활동가 및 동료지원가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내가 당사자 활동가 및 동료지원가 분께 당부하고 싶은 말은, 활동을 하면서 슬픔과 절망을 마주하게 된다면 마음껏 슬퍼하고 절망하라고 것이다. 슬픔과 절망은 당사자 운동을 진정성 있게 해온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다. 사람을 싫어하려면 사람을 갈구할 줄 알아야 한다. 당사자 운동에 실망과 절망을 하려면 당사자 운동에 몰입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마주한 절망적인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당사자들이 경험하는 사회의 차별과 편견을 자기 일과 같이 받아들이고 당사자의 곁에 함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슬픔과 절망은 진정한 당사자 활동가만이 느낄 수 있는 공감의 표식이기도 하다.

당사자 운동을 하면서 절망을 느꼈는가? 충분히 슬퍼하되, 그 슬픔을 헤쳐 나갈 방법을 ‘함께’ 찾자. 그리고 함께 오래 운동을 해 나가자. 지난하고 길더라도 끈질기게 운동을 해 나가자.

[더인디고 THE INDIGO]

정신적 장애인의 당사자주의는 아직 미약하다. 정신적 장애인이 정말 당찬 당사자주의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미약한 당사자주의가 창대해질 수 있도록 자그마한 글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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