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비교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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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과 만연필, 잉크펜. /사진=픽사베이
▲연필과 만연필, 잉크펜. /사진=픽사베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학교에서 내가 맡고 있는 업무 중 하나는 선생님들의 업무용 컴퓨터를 구매하는 일이다. 정해진 예산 내에서 최적의 구매를 해야만 가능한 많은 선생님에게 쾌적한 사무환경을 제공할 수 있으므로 기기를 고르는 나의 마음가짐은 매우 신중하다.

저장장치는 속도를 빠르게 할 것인지 용량을 조금 더 큰 것으로 할 것인지, 영상작업이 점점 늘어나는 학교 환경을 고려하면 그래픽 카드는 어떤 것으로 고를지, 본체는 휴대성을 높인 가벼운 것으로 할지, 조금 무겁더라도 성능이 좋은 것으로 할지, AS가 잘 되는 브랜드를 택할지, 가격이 저렴한 중소기업의 물건을 택할지, 새로운 세대의 CPU가 출시되는 시기는 언제일지 등을 고려하다 보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컴퓨터를 고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된다.

원하는 것과 그나마 가장 비슷한 제품을 고르고 나서 부품 몇 개 정도를 교체해 줄 수 있다는 약속까지 받아내고 나면 그제야 일차 선택을 마무리하게 된다. 꼼꼼하게 고른 만큼 선생님들이 좋아하실 것을 생각하면 실무자로서 한껏 뿌듯한 마음이 올라온다.

‘이 가격에 더 이상 좋은 구성은 없을 거야!’라는 확신이 들면 당장 구매를 진행하고 싶지만, 업무 절차상 그럴 수는 없다. 아무리 완벽한 선택이라 하더라도 비교할 수 있는 다른 제품을 한두 개 정도 고르고 선정위원회를 거쳐야 한다.

가격은 비싸지만, 최고 성능을 가진 제품이나 조금 다른 특성을 가진 제품을 찾고 일차로 선택한 제품과의 장단점을 표로 만들어 위원들의 결정을 물어야 한다. 의도를 담아 선택을 유도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므로 나름은 공정한 비교군을 만들지만, 최선을 다해 골랐던 첫 번째 선택으로 내 마음은 기울어진다.

“A 제품은 이런 특징이 있고요. B 제품은 이런 장점이 있습니다. C 제품은 그런 면에서는 단점이 있지만 반대로 보면 장점이 되기도 합니다. 위원님들 의견은 어떠신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절차대로 공정하게 진행하긴 하지만 만장일치로 A 제품을 고르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B 제품 참 좋네요.”, “A 제품보다는 C가 낫지 않을까요?”라는 몇몇 의견이 나올 때도 균형 잡힌 회의록 작성을 위한 의도 있는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표결로 결정하겠습니다. 최종적으로 맘에 드는 제품을 말씀해 주세요.” 웅성웅성하며 마지막 의견들을 나눈 위원들의 결정은 B 제품이다. 만장일치로 A 제품이 결정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생각일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결과가 나오긴 했었다.

내가 골랐던 모델로 결정되긴 했지만, 비교군으로 놓았던 기기에 투표한 숫자가 적지 않았었다. 그 또한 균형을 맞추기 위한 누군가의 의도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의 결정을 마주하니 그때의 생각 또한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듯하다.

난 분명 최선을 다하고 적지 않은 고민과 조사를 했지만 그 결정의 기준은 객관이 아닌 나의 주관에 의한 것이었다. 가벼운 제품보다는 성능이 좋은 제품을 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었고 AS가 잘되는 것을 우선하여 고려하고 싶었지만 당장의 성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결정의 이유를 차근차근 듣다 보니 나와 다른 선택들에도 타당한 근거들은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가 듣기에도 그럴듯했다. 다른 분들도 각자의 기준대로 신중하게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 결정에도 타당성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물건이 존재한다. 내 선택을 받는 매력적인 물건은 그 중 아주 일부이지만 다른 물건들도 나와 다른 결정을 택한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팔려나간다. 내가 내린 선택만이 언제나 옳다면 모두 나와 같은 물건을 선택하겠지만 서로 다른 물건을 각자의 다른 기준으로 구매한다는 것은 여러 다른 옳음이 존재한다는 근거가 된다.

공공기관의 물품구매는 언제나 비교 견적이 필요하다. 공동체 안에서 나의 주장도 다른 이들의 생각들과 숱하게 비교하고 타협해야 한다. 한 가지 물건을 고르더라도 여러 개 중에 고르는 것이 나은 것처럼 한 마디 생각과 말도 다른 이들과의 조율 안에서 더 나아질 수 있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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