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순의 토크백] 엄마라는 이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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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바라보듯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모습 ⓒ유금순
▲해를 바라보듯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모습 ⓒ유금순

[유금순 = 더인디고 집필위원]

▲유금순 더인디고 집필위원
▲유금순 더인디고 집필위원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라는 JTBC의 모녀 여행 이야기 프로그램을 어쩌다 보게 됐다. 일요일 밤마다 본방 사수하진 못했고, 얻어걸리는 시간대에 보게 될 때마다 “아, 좋겠다. 아~ 부럽다.” 부러움 가득한 혼잣말을 되뇌곤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톱스타 딸과 여행을 떠나는 엄마 모습을 로드무비 형식으로 담아내는 프로그램이라는데, 톱스타 모녀도 사는 건 우리네와 비슷하구나 싶으면서 나와 엄마의 여행은 언제였었는지 더듬어보니 기억이 아득했다.

어느 집이나 하나쯤은 갖고 있다는 사연, 그런 게 우리에게도 있어서 혼자서만 간헐적으로 엄마와 만나온 세월이 있었으니 누가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모처럼 늘어지게 늦잠 자고 난 토요일 오후, 느긋한 점심 끼니로 삶은 계란 반 개 얹고, 강원도 원주의 시누 농막에서 뜯어 온 상추랑 치커리 송송 썰어 섞은 시판 비빔면을 양푼째로 먹던 중이었다.

톱스타와 엄마의 저녁 식사 장면을 재방송으로 시청하는데, 30년 만에 엄마가 끓여주는 오징어 국을 맛보고 아무 말 없이 침실에 가서 소리죽여 우는 이효리 씨 모습을 보다가 먹던 비빔면에 나도 그만 울컥했다. 행여 남편에게 들킬세라 눈물을 삼키고, 동하는 마음을 숨기느라 애먹었다.

나의 원가족은 다섯 명으로 부모님과 맏이인 나 그리고 남동생 둘이다. 어릴 때 엄마는 찬바람이 불 때쯤이면, 무와 두부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어 시원한 국물 맛의 동태찌개를 푸짐하게 끓여주시곤 했다. 엄마의 시원한 손맛은 아직도 흉내내기 어렵지만, 감칠맛 정도는 인공 조미료를 적절히 활용해서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 줄 아는 내공이 내게도 쌓였다.

엄마는 무에 그리 맛있는 거라고 여느 엄마들처럼 동태 대가리를 선점하고, 살덩어리 많은 부분은 아버지와 우리 삼 남매에게 골고루 분배해 주셨다.

맛있게 먹다 보면 내 찌개 그릇 바닥에는 동태알이 자태를 드러내곤 했다. 눈을 들어 엄마를 쳐다보면, 엄마는 비밀스러운 눈빛으로 조용히 먹으라고 말했다. 고소한 알을 달게 먹고도 엄마의 동태 대가리에서 눈알마저 쏙 빼 먹었던 나는 좀 얌체 같은 구석이 있었나 보다.

이효리 씨도 살림살이가 넉넉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 온 가족이 먹을 수 있을 만큼 양을 늘려서 끓여주었던 엄마의 오징어 국에 그만의 사연이 있었나 보다. 간을 봐달라는 엄마의 말에 오징어 국을 한 술 맛본 이효리 씨는 돌연 방으로 들어가 엄마 몰래 눈물을 훔친다. 이유는 달라도 왜 우는지 알 것 같았다.

음식은 추억을 부르는 힘으로 사람을 잇는 것 같다.

비빔국수보다 물국수를 좋아했던 나에게 맞춰 두 가지 국수를 성가신 내색 없이 해줬던 엄마가 나도 생각났다. 엄마는 딸이 먹고 싶어 하는 물국수를 해주면서 당신이 좋아하는 비빔국수도 포기하지 않았다. 배곯고, 못 먹었던 시절을 겪었던 엄마는 새끼들이 먹고 싶다는 건 웬만하면 다 해주는 분이었지만, 자신을 마냥 희생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동네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로 연애했다는 나의 엄마와 아버지는 양가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은커녕 연애도 숨어서 했다는데, 아버지의 간절함에 그만 부모님이 져주셔서 부부 인연을 맺었단다. 그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다 알만한 동네에서 아버지는 좀 사는 집 셋째 아들이었고, 엄마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 맏딸이었다.

나도 현재 결혼생활 중이지만, 빈부 혹은 배움의 격차가 너무 크다거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희생하는 듯한 불공정거래 계약은 언젠가 어느 한쪽이 억울해지면서 흔들리는 것을 직간접으로 알게 되었다.

나와 남편은 같은 지체장애가 있기에 비슷한 경험과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토닥토닥하는 날만 있으리라 섣불리 짐작했었으나, 도리어 고슴도치처럼 서로의 가시로 찌르고 쑤시는 시간이 있었으니 그것이 결혼생활의 절반이었다 해도 지나침이 없다.

엄마 나이 스물두 살에 나를 낳았다. 반대한 결혼을 해서 첫 아이로 딸을 낳은 엄마는 같은 해에 아들을 낳은 손윗동서에게 기죽어 살았다고 했다. 친할머니는 아들을 낳은 큰엄마에겐 미역과 소고기를 끊어다 주셨지만, 딸을 낳은 엄마는 들여다보지도 않았다고 내내 이야기하셨다.

큰엄마 젖이 부족해서 내가 먹을 젖까지 뺏어 먹고 자란 큰엄마 아들은 나중에 의사가 될 뻔하다가 약사가 되었고, 난 어른들 보기에 사람 구실이나 하고 살지 걱정스러운 말라가는 청춘일 뿐이었다. 젖을 나눠 먹은 게 왜 밥그릇 뺏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는 성별로 인한 차별 때문에 생긴 억울함 같기도 하다.

머리카락 한 올이 삐져나오지 않게 동백기름으로 빗어 넘긴 쪽머리의 친할머니는 늘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줍고, 방을 청소하는 깔끔쟁이였다. 흉보다 닮는다더니 나도 이십 대엔 어설픈 깔끔쟁이였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니 성향도 바뀌어 갔다.

나를 향한 할머니의 곱지 않던 시선은 어느 날부터인가 주문으로 바뀌었다.

“고추밭에 터 팔아라.”

그 주문이 효험이 되었는지 내가 남동생을 둘이나 본 후에야 엄마와 나는 비로소 인정받는 존재가 되었다. 신기가 있었다는 친할머니는 곧잘 낮술에 취한 채 천수경을 틀곤 했었지만, 불심은커녕 저주와 욕설을 서슴지 않아서 할머니의 천수경은 어린 나에게 그냥 무자비한 소음 같았다.

낮술에 취해 분을 삭이는 친할머니의 사정 같은 걸 헤아릴 만한 나이가 아녔던 내게 할머니는 고약한 어른이었다. 부모가 반대한 결혼을 해서 첫 아이인 내게 살이 내린 거라는 어마어마한 이야기는 장애가 드러나기 시작한 내게 붙은 설명서였다.

잘못된 설명서는 그릇된 영향력으로 나와 엄마를 옥죄었는데, 그래선지 노래방에서 엄마의 레퍼토리 중 18번은 ‘여자의 일생’과 ‘수덕사의 여승’이었다. 여자로 사는 삶, 장애 있는 자식을 둔 엄마의 삶, 그 모두가 버거워 차라리 속세를 떠나 여승이 되고 싶은 심정이었을까. 그래서 나는 딸이자 여자이며, 장애가 있는 게 징그러울 때가 많았다.

나에게 엄마는 가끔 언니 같기도, 친구 같기도 했다. 자신을 가꾸는 걸 좋아했던 엄마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소개했다는 가수 윤복희처럼 짧은 치마를 입고, 쇼트커트를 했었다고 한다.

내가 열두세 살 때쯤 엄마는 요일별로 다른 색의 양장 옷을 가진 멋쟁이였다. 옆트임 치마에 귀걸이도 두서너 개 하고, 머리카락도 밝은 갈색으로 물들여서 눈에 띄였다. 웃지 않을 땐 표독스러워 보였지만, 입꼬리를 끌어올려 피식 웃을 땐 어린 여자였던 내게도 매력 있어 보였다. 그런 화려한 엄마의 외모가 부끄러워서 전원일기의 촌부 같은 엄마를 그려본 시절도 있었다.

남다른 자신만의 개성과 매력은 결혼하고, 장애 있는 딸을 키우면서 모두 지워져 갔다. 이제 엄마는 한 남자의 여자와 세 아이의 엄마로만 살아야 했다.

가난했던 가정의 6남매 중 장녀였던 엄마는 아버지와 결혼하면 제대로 된 월급봉투를 따박따박 받으며 안정적인 삶을 살리라 기대했지만, 아버지는 하룻밤 화투 놀이로 한 달 월급을 여러 차례 탕진한 걸로 안다. 동네가 시끄럽게 부부싸움을 하던 부모님은 마침내 내가 열대여섯 살쯤에 남이 되었다.

20여 년 전 6월에 나도 엄마라는 이름을 얻을 뻔하였다. 낳고 보니 여기저기 많이 아팠던 아기를 일주일 만에 보내줘야 했다. 쓰라렸던 시간을 경험하면서 나를 포기하지 않고, 당신 몫을 다해주었던 엄마가 고마웠다.

아홉 달 동안 어떤 엄마가 되겠다는 포부도 없이 오로지 뱃속에서 무탈하기만을 바랐건만, 열 달을 못 채운 출산을 했고, 일주일 만에 아기를 떠나보낼 땐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경험했다.

경제관념에 있어 차이와 오류가 있었던 엄마로 인해 온 가족이 값을 지불했던 시간도 있었다. 그래도 삼 남매가 남에게 손가락질받지 않고, 꿈질하지 않으며 단단하게 살아왔으니 고마운 일이다.

15년 전 6월에는 아버지가 먼 길을 떠나시기도 했다. 평소 살갑지 않은 부녀지간이었건만, 아버지가 떠나신 후 밥 한 끼 같이 못 했던 시간이 아쉽고, 속상해서 한동안 울었던 생각이 난다.

한동안 내게 엄마와 아버지란 단어는 어떻게 한마디로는 설명 안 되는 복잡다단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가정을 지켜주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그건 엄마가 여자니까 좀 더 참고 견디라는 말과 다를 바 없이 그야말로 ‘여자의 일생’ 노랫가사와 같지만 말이다.

강원도 원주 시누 집에 계신 시어머니는 요즘 요양보호사와 민화투 치는 재미에 빠지셨다고 한다. 아들 생일은 잊어도 며느리 생일은 꼭 챙겨주셨던 분, 열심히 사느라 네가 힘든 것 다 안다고 격려하시던 분, 철철이 집된장과 고추장, 고춧가루와 참기름을 챙겨주시던 엄니는 지금 추억과 맞바꾸는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이젠 오는 전화를 받는 것도, 전화 거는 방법도 잊어버리셨다. 자식 잘되기를 바랐던 우리 엄마들은 흐린 기억을 붙들고, 아픈 무릎을 끌면서도 오늘을 밝히고 계신다.

깜짝 놀라거나 무서운 일을 당했을 때, 무의식중에 튀어나오는 감정감탄사가 ‘엄마야’인 것을 보면, 여전히 우리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엄마 같다.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

이효리 씨처럼 엄마와 단둘이 하는 여행을 꿈꾸기는 힘들지만, 맛있는 밥 먹으며 엄마들과 추억의 책장을 넘기는 시간은 힘껏 가져봐야겠다.

“당신과 함께한 달콤했던 시간을 기억합니다.”

[더인디고 THE INDIGO]

장애인권강사, 동료상담 및 사례상담가로 활동하였으며 2019년 대전 무장애 관광 가이드북(무장애대전여행)을 발간(5인 공저)하였습니다. 현재 한국접근가능한관광네트워크 이사,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소속 직장내장애인인식개선교육과 활동지원사 및 근로지원인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 실제 교육과 보수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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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998ec39404@exam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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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yju0303@nate.com'
이은주
2 days ago

가슴이 따뜻하기도 하고 먹먹해지기도 하고 입가에 엷은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는 한편의 수필 너무 잘 봤어요..오랜시간 선생님을 봐 왔지만 수박 겉핣기 식이였던 거 같으네요.. 가슴아픈 사연을 읽으며 그래도 항상 미소가 아름다웠던 얼굴을 잠시 떠올려 보는 아침입니다..오늘도 좋은날 이쁜 하루 파이팅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