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소풍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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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드리워진 먹장구름은 켜켜이 쌓여 금방이라도 아파트 단지 위로 와지끈, 무너질 듯 위태롭다. 주걱으로 한 움큼 퍼낸 듯 좁장한 자리에 촘촘하게 들어찬 영구임대아파트단지에는 무려 2천 여 세대가 입주해 산다고 했다. 야트막하게 둔덕진 길을 따라 걷다보면 아파트 입구부터 각 동(棟)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도로가 나타난다. 경비실 바로 옆에는 동을 안내하는 푯말이 바지랑대처럼 삐주름히 서 있는데, 푯말에는 <복지공원(福祉公園) 200m>라고 굵은 고딕체로 적힌 안내판이 고정나사가 풀려 잔바람에도 덜렁거린다.

남자의 아파트 베란다 창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이 조붓한 공간은 부르기 좋아 공원이지, 시설이라고는 겨우 구색을 갖춘 어린이놀이터를 앞마당 삼은 육각지붕의 정자(亭子)가 옹색하게 서 있을 뿐이다. 낡고 퇴락한 정자 뒤편으로 병풍처럼 에두른 벚나무들과 구새먹은 늙은 은행나무가 푸르던 잎들을 모두 떨군 채 앙상하게 서있다. 숲정이가 헐벗은 것이야 계절 탓이겠지만, 패이고 짓이겨져 거개가 누런 흙밭으로 변한 잔디밭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남자가 6개월을 기다린 끝에 입주한 1002동 18층 맨 끝 집은 용케 햇빛이 지천이다. 더구나 베란다 창을 통하면 아파트 단지는 물론 맑은 날에는 제법 떨어진 시가지 정경까지 한눈에 보인다.

동살 무렵부터 베란다에 놓인 듀오백 좌식의자에 앉아 창밖만을 무연히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의 갈쌍해진 눈길이 한 대의 휠체어 꽁무니를 붙좇는다. 을씨년스런 날씨 때문인지 잿빛 건물들은 동토(凍土)를 뚫고 불쑥 솟은 매머드의 거대한 갈비뼈처럼 보였는데, 그 사이로 휠체어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남자가 이사 오던 첫날 느닷없이 찾아와 계(季)반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넉살좋게 웃던 사내다. 계반장은 조붓한 휠체어 시트에 등을 한껏 꼬부리고 동그마니 앉은 자세 탓인지, 뜻밖에도 작은 아이처럼 보인다. 그의 휠체어는 미끄러지듯 아파트 도로를 따라 장방형의 공원을 두어 차례 맴을 돈다. 한껏 치켜 올린 점퍼 깃에 반쯤 가려진 계반장의 표정은 의식을 준비하는 노회한 박수무당처럼 사뭇 진지해 보이기까지 하다.

– 삐–익.

그가 느닷없이 호각을 불어댄다. 새된 호각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남자가 귀를 틀어막는다. 계반장이 불어대는 호각 소리는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맥 빠진 아파트 단지의 멱살이라도 잡아채 깨우기라도 하려는 듯 앙칼지고 끝없이 울려 퍼진다. 잠시 후 호각 소리가 신호인 듯 뼈숲을 헤치고 수많은 휠체어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한다.
남자는 그 광경을 보고서야 오늘이 소풍 가는 날임을 겨우 기억해낸다. 문득 남자의 입에 물렸던 담배가 제풀에 툭, 떨어진다. 남자는 엉겁결에 자신의 다리로 떨어지는 담배를 털어내려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다. 아니, 일어서려고 발버둥 치던 남자는 자신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다리가 허방을 짚었다고 느끼며, 앞으로 곤두박질친다. 담배는 대퇴부까지 잘려지고 없는 두 다리 때문에 한 뼘 남짓 남은 의자시트에 고스란히 떨어져 있다.

아파트 입주하던 날 이른 새벽에야 아내는 굽 높은 슬리퍼를 딸각거리며 찾아왔다. 남자와 이혼을 한 후 딸아이와 함께 처가로 옮겨 앉은 아내는, 젖은 맨발로 이삿짐을 꾸렸다. 장마철 하늘은 며칠째 숨이 막힐 듯 멱차게 물을 머금기만 할 뿐 빗줄기를 쏟아내지 못했다. 정오 무렵 남자를 실은 아내의 차가 이삿짐센터의 트럭 꽁무니를 쫓아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기어이 가랑비가 찔끔대기 시작했다.

– 저기, 맨 꼭대기 층이라네요.

아파트 관리실에서 열쇠꾸러미를 가져온 아내가 허공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차멀미로 속이 뒤집혀 건구역질을 하던 남자는 갈쌍거리는 눈으로 아내의 손가락 끝을 쫓았다. 하지만 남자의 눈에 보인 것은 손끝에 매달린 아파트 건물이 아니라 불안과 불쾌감으로 사뭇 떨리는 아내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었다. 그렇게 장마는, 메말랐고 지루하게 길었다.

[더인디고 The 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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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c50571a654@example.com'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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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is50@naver.com'
프레니
4 years ago

2화 기대됩니다.^^

jsd1220@hanmail.net'
정신덕
4 years 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