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살아 있는 偶像 2화

끔찍하게도 추웠던 그 해 겨울을 도저히 잊을 수 읎도록 우리의 어린 가슴에 깊은 화인(火印)을 남긴 사건을 말임다. 이 놈의 변변찮은 기억으로는 아마 중학 이 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던 날이었을 겁니다만.

여느 아이들은 한 달 동안 <가나안>이 베푼 안식을 가족들과 혹은 먼 일가친척이나마 피붙이들과 보내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었습죠. 아침부터 흩날리기 시작한 진눈깨비는 정오가 지나자 굵은 눈발로 변해 어느새 <가나안>의 황량한 벌판을 뒤덮었슴다. 짙은 회색빛 하늘은 쏟아지는 함박눈에 파묻혀 어둠침침하기까지 했더랬슴다.

기숙사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못내 석연치 않아 볭문이와 이 놈은 쌓인 눈 위를 서성거렸심다. 왠 바람이 그리도 차갑던지……. 입김으로 녹이던 손을 괴춤에 넣었지만 손이 녹기는커녕 도리어 불알이 쪼그라들 지경이었드랬슴다. 목발을 그러쥐고 있던 볭문이의 양 손등은 벌겋게 얼어버린지 하메 오래 되었구만요.

“너무 춥다, 볭문아 방으로 고만 드가자.”

“난 괜찮구먼. 추우면 니나 들어가라.”

사실 너무 추워서 들어가자꼬는 혔씸다만 이 놈 역시 기숙사 방에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았씸다. 방에 쭈삣거리고 들어가봐야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설랑 곧 집으로 떠날 친구들의 기쁨에 들뜬 표정이나 맥읎이 쳐다봐야 했을 테니께. 그래도 이 놈은 상구 부모님께서 함께 동행할 수 읎다꼬 당신들의 집안 형편을 애석해 하시믄서 손에 쥐어준 풀빵꾸러미를 사물함 깊숙이 감춰두었기에 아쉰대로 상심한 마음에 위안을 얻을 수 있었읍죠.

먹는 것이라곤 하루 보리밥 세 끼가 빠듯한 우리에겐 그만한 주전부리거리는 참으로 감지덕지한 횡재가 아닐 수 읎었지요. 한창 자랄 때라서 그랬는지 늘 식욕이 왕성한 만큼, 소화력 또한 지겹도록 좋아서 이 놈은 항상 궁한 뱃속을 탓하곤 했더랬씀다. 혹 다른 쌩고들의 눈에 띌까봐 고심했던 이 놈으로서는 당신에게 상납할 풀빵의 개수를 머릿속으로 가늠하느라 여념이 읎었슴다.

만약에 상납을 하지 않고 들켰다간 독식죄(獨食罪)의 벌인 이른바 <덮치기> 방식으로 풀빵을 압수당해야 할 처지였응께요. 이제사 말씸드립니다만, 숫기가 읎었던 이 놈은 당신이 창안했다는 그 <덮치기>가 무척 싫었씸다. 한 사람이 먹어 치워도 시원치 않을, 적은 양의 군입거리를 앞에 놓고 당신의 ‘박아’라는 신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머리통을 쳐박듯 달려드는 꼴이란 게 여간 궁상스러운 짓이 아니니께요.

몸동작이나 눈치가 재빠른 녀석들이나, 힘이 센 아이들에겐 턱읎이 유리했던 그 불공평함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구요. 시방도 이 놈은 가끔 <덮치기>를 하는 악몽에 시달리곤 헙니다. ‘박아’를 외치고는 한 걸음 물러선 채로 왜소한 우리들의 번잡스런 아우성을 지켜보고 섰던 그 냉담한 당신의 눈빛까지 말임다.

해거름녘이 가까워서야 눈발에 젖은 입성을 말릴 요량으로 이 놈은 기숙사로 찾아들었심다. 볭문이는 원장님에게 할말이 있다꼬 비칠비칠 사무실로 가더구만요. 그렇게 맥읎이 헤어질 때까지 이 놈과 볭문이 사이에 오고 갔던 대화는 기껏해야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서로의 한계를 확인하는 정도였슴다. 그날따라 지나치게 말을 아끼던 볭문이의 굼뜬 언동 탓도 있겠지만서도, 서로의 질문에 가벼운 응수로밖에 대할 수 읎었던 그 당시 <가나안> 고아들의 외로운 심경이 훨씬 적절한 이유라꼬 말씸드리고 싶구만요. 여느 아이들처럼 안식할 둥지가 읎다는 서로의 처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탓이겄지요.

“너의 엄마는 왜 널 버렸을까?”

“몰라.”

“…아니면, 죽은 걸까?”

“씨팔, 몰라…”

이따위 우문우답이나 지껄이고 있는 게 어쩔 수 읎는 그 당시 우리들의 고질적인 마음의 병증이었으니께요.

방은 텅 비어 있더구만요. 그 넓은 방에 혼자 덩그마니 남아있다는 사실에 이 놈에게도 적잖이 당황이 되더랬슴다. 그때는 이미 고독에도 웬간히 무뎌진 후였는데도 말임다.

따지고 보면 고독이라는 제법 근사한 말도 사춘기 때의 아슴한 감정으로만 맛볼 수 읎었던 어린 날의 궁핍했던 이 놈의 정서는 여태까지도 겪은 자의 우월감 섞인 오만으로 남아 있슴다. 그런 탓인지 요즘 젊은 것들이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고독을 운운하면 그만 고소를 금치 못하구만요. 이 놈의 이런 편념은 아주 어릴 적 기억에서 비롯되었지요. 실루엣과도 같은 형상의 단애들로 기워진 볼품 읎는 기억에 불과헙니다만.

짙은 턱수염 때문인지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사내의 남루한 등에 업혀 기차를 타던 일… 사내는, 아니 아버지는 김밥이며 삶은 달걀로 어린 이 놈의 어린 환심을 사려고 꽤나 애를 썼더랬슴다. 그러나 아버지의 넉넉한 주전부리에 도취되어 곤한 잠에 빠졌던 이 놈이 한기를 느껴 퍼뜩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삼등열차 객실의 후덥한 공기 속이 아니더구만요.

다만, 먼지 때에 절은 역사(驛舍)의 유리창에는 자신을 내버린 아버지를 찾아 두릿거리는 한 아이의 근심스런 얼굴이 뿌옇게 앉아 있었구만요. 새벽열차의 탁한 금속성 발자국 소리들만이 질서 있게 들려오는 생명부지의 장소에서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에 묻힌 어린아이의 두려움을 상상이나 해보셨습니꺼?

이 놈은 결코 잊을 수가 읎더구만요. 손수건으로 찍어낸 눈물의 양으로 아들이 겪을 암담한 삶의 노정을 한스러워하고 있을 부모라는 작자들의 무책임한 청승을 저와 함께 슬퍼하던 열차의 울음소리를…….

이거, 미안험다. 어줍잖은 옛일을 되새기다보니 주책맞게도 콧마루가 맵싸해지는구만요.

혼자라는 음울한 수렁 속에서 요행히 이 놈을 구한 것은 저녁식사를 알리는 식당의 종소리였슴다. 식당으로 부리나케 달려가니께 방학을 맞이한 우리의 들뜬 기분에는 아랑곳읎이, 평소와 다름읎는 멀건 시래기국이 기다리고 있었습죠. 그걸 보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더구만요. 그렇지만 허는 수 읎이 주린 배를 채우고는 한껏 느긋해진 포만감으로 식당 문을 막 나서려고 할 때였슴다.

기숙사와 식당을 연결한 시멘트길을 당신이 겅중겅중 달려오고 있는 게 보였는데, 그 때 당신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입가에는 침버캐가 하얗게 말라있었습죠. 이 놈은 내심 추위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혔지만서두 당신의 눈썹 주변에 파랗게 돋은 핏줄이 눈에 뜨이자 몹시 화가 나 있다는 걸 순간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슴다.

“볭문이 그 새끼 지금 어딨어? 네가 온종일 그 자식하고 붙어 다녔다던데….”

당신의 맵찬 손바닥이 이 놈의 언뺨을 후려친 때와 볭문이의 행방을 다구치던 악다구니는 거의 동시였다고 기억되는구만요. 뜻밖의 따귀세례에 얼이 빠진 이 놈은 그저 파들대던 당신의 입술을 힐끗거릴 수밖에 읎었죠. 서늘한 무섬증이 등줄기를 타고 사금파리 같은 소름을 일으켰슴다.

“요것 봐라, 나참 게는 가제 편이라더니…. 좋아. 오늘 밤 쌩고 놈들 한 새끼도 빠짐없이 모두 집합이다!”

물이라도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습니꺼? 차라도 마시자구요? 아니, 괜찮슴다. 이 놈은 그냥 따뜻한 보리차면 족하니께.

얼얼한 통증이 채 가셔지지 않은 귀밑대기를 어루만지던 이 놈의 귓바퀴에는 서릿발 같던 당신의 탁한 음성이 질근질근 맴돌고 있었슴다. 어느덧 잦아든 눈발 대신에, 매섭게 불어대는 칼바람을 좇아 연속으로 울리던, 항명의 엄두조차 꼼지락거릴 수 읎었던 단호한 음절들이 소름 끼치도록 예리한 화살촉으로 변해 이놈의 온몸에 사정읎이 박혔던 거였슴다.

당분간의 안식을 얻은 기쁨으로 눈꽃보다 더 새하얗게 웃던 쌩고들-당신은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들의 호칭으로 쌩고로,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어쩔 수 읎이 고아가 된 아이들은 반고라는 호칭으로 나눠 불렸는데-의 얼굴에는 어느새 짙은 우려의 빛이 점점이 물들고 있었슴다. 몇몇 아이들은 제법 용기를 내어 당신의 무한한 힘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까지 했습죠. 허지만, 그들의 불평은 당신의 방심 속에 암암리에 보장되었던 최소한의 자유로운 감정표현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죠.

[더인디고 The Indigo]

(사)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정책실장,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하지만 소설쓰기는 호구지책이 못되어서 세상을 배회하다 지금은,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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