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경의 컬처 토크] 생명의 무게 Vs 고통의 무게

0
221
▲AI 로봇 간호중(사진 왼쪽)과 10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는 딸 연정인(사진 오른쪽)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유튜브 캡처
▲AI 로봇 간호중(사진 왼쪽)과 10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는 딸 연정인(사진 오른쪽)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유튜브 캡처
  • 영화 <간호중, 2020>

[더인디고=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더인디고 편집위원

나는 로봇이다. 10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환자를 돌보는 독일제 AI 간병로봇이다. 내 얼굴은 내가 간병하는 환자의 딸, 연정인을 닮았다. 나 같은 간병 로봇들은 모두 환자에게 친숙한 그 가족의 얼굴을 닮도록 제작되었다. 2046년의 서울엔 학교보다 요양시설이 더 많다. 급속한 노령화가 가져온 어쩔 수 없는 시대상인지도 모른다. 학교보다 많은 요양시설의 빼곡한 병실에서 환자와 그를 돌보는 AI 로봇이 무기력한 하루를 보내는 모습이 바로 2046년의 현실이다.

내 이름은 ‘간호중’. 내가 돌보는 환자의 딸, 연정인은 나를 친근하게 호중이라고 부른다. 그녀는 많은 돈을 지불하고 나를 구매했고 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힘든 나날을 버틴다. 비싼 나는 일반적인 보급용 로봇이 아니다. 보급용 로봇은 환자만을 돌보지만 고급형인 나는 환자의 가족까지 돌보도록 프로그래밍 돼 있다. 식물인간인 환자의 신체적 돌봄 이외에도 그 가족인 연정인의 모든 신체적, 정신적 상태를 체크하고 돌보는 것이 고급형인 내가 할 일이다.

어느 날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환자를 죽이지 않으면 딸 정인이 죽어버릴 것만 같다. 로봇인 나는 10년을 하루같이 환자를 돌보는 일을 무감하게 해낼 수 있지만 인간인 딸은 그렇지 않다. 나무토막처럼 누워 있는 엄마에 대한 애틋함과 죄책감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날마다 지쳐가고 있다. 극도의 우울감에 빠진 정인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인도 옆방의 정길 아줌마 같은 선택을 할 확률이 너무 높게 예측된다.

정길은 치매 걸린 남편을 돌보다 지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옆방의 보호자다. 그녀는 남편을 목 조르려다가 자신을 닮은 간병 로봇에게 저지당하자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길을 닮은 간병 로봇은 싸구려 보급형이었기 때문에 가족인 정길까지 케어하지 않는다. 정길의 괴로운 몸부림을 간병 로봇은 환자에 대한 학대와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나는 환자의 가족까지 돌봐야 하는 고급형 로봇이 아닌가. 환자와 정인, 둘 중 누군가 죽어야 다른 하나가 살 수 있다면 나는 누구의 목숨을 살려야 할까.

여기까지가 간병 로봇 호중의 갈등이다. 2046년 AI 로봇이 간병하는 머지않은 미래를 그린 민규동 감독의 SF영화 ‘간호중’의 이야기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간병 로봇 간호중은 생명의 전화로 사비나 수녀님과 상담까지 해가며 로봇답지 않게 깊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정인을 살리기로 선택한다. 의료기기들에 의지한 채 나무토막처럼 누워 숨만 쉬고 있는 환자 생명의 무게보다 그를 지켜보며 야위어 가는 딸 정인의 고통의 무게가 훨씬 더 위중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 생명의 생산성, 효율성, 생명이 미치는 영향력, 생명유지에 드는 경제적 비용과 부담, 향후 전망과 가능성 등 AI가 가진 데이터 수치와 확률로만 계산한다면 젊은 생명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얻는 기대효과가 훨씬 월등하게 효율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AI 간호중이 간과한 것은 한 생명이 관계를 통해 가지는 존재의 무게! 단지 보이고 만져지는 유형의 어떤 것 말고 관계와 교감을 통해 쌓이는 ‘존재감’이라 이름하는, 영혼의 흔적 같은, AI가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것 말이다. 평생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어도 좋으니까 제발 곁에 살아만 있어 달라고 간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AI가 대체 어떤 수치로 계산해낼 수가 있을까. 서로의 영혼에 깊이 드리운 존재의 그늘은 그 누구도 쉽게 지울 수가 없는 무거운 것이다.

그런 모든 것들을 지워버리고 수치와 확률로만 생명을 계산하면 무엇이 남게 될까.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도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던가. 자폐인 김정훈과 서울대 출신 수재인 그의 형의 죽음을 두고 손쉽게 생명을 저울질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AI 간호중이 내린 선택의 오류는 이 시대 인간이라는 시스템 안에서도 여전히 버그를 일으키는 중이다. 한 존재의 그늘을 가늠하지 않고는 우리는 누구도 생명의 무게를 예단해서는 안 된다.

한편, 간호중에게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선택이 한 인간의 고통에 대한 지극한 공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지극한 공감, 호중에게 정인이 너무 무거운 존재였던 것. 호중이 정인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정인과 호중의 관계에서 비롯된 시스템 오류가 오히려 존재를 증명하는 아이러니가 된다. 결국 호중이 내린 선택에서 한 생명은 지워냈지만 존재는 결코 지워내지 못한 것이다.

시스템 오류를 분석하기 위해 독일 본사로 수거된 로봇 간호중을 찾아간 사비나 수녀에게 간호중은 고통스러워하며 죽음을 애원한다. 고통에 치닫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다워진 로봇 간호중. 그 모습을 통해 영화는 이렇게 묻는 듯하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과연 인간을 존엄하게 하는가. 아니면 고통이 인간의 실존을 증명하는가.

자, 그럼 다시 질문해 보자.

생명의 무게와 고통의 무게 중에 어떤 것이 더 무거운가?

[더인디고 THE INDIGO]

라디오 방송과 칼럼을 쓰고 인권 강의를 하면서 나름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을 걸어왔습니다. ‘easy like Sunday morning...’ 이 노래 가사처럼 기왕이면 일요일 아침처럼 편안하게 문화를 통한 장애 이야기로 말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승인
알림
663000370a28f@example.com'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