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의 TheWorldGO] 기만적(?)이던 스위스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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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 카페에서 건네준 기만적인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진=김소영 집필위원
▲ 스위스 카페에서 건네준 기만적인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진=김소영 집필위원

[더인디고=김소영 집필위원]

김소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김소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심의가 진행되었던 스위스 제네바는 한국보다 7시간 느렸다. 시간에 맞춰 업무에 임하기 위해 커피는 필수였다. 제네바의 8월 햇볕은 생각보다 따가웠고, 한국에서 먹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간절했다. 하지만 근처 몇 개의 커피숍을 돌아봐도 ‘커피=에스프레소’가 공식인 유럽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파는 곳이 거의 없었다. 마지막 도전이다 싶은 생각으로 들어갔던 카페에서 감사히도 ‘있어요. 커피에 얼음을 넣어 줄게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기뻐서 한국말로 감사 인사가 튀어나왔다.

기다리다 받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기만적(?)이었다. 종업원이 건네준 커피는 여전히 따뜻했다. 헛웃음이 나서 잠깐 쳐다보다가 한 모금 마시기 시작할 때는 이미 넣어준 얼음이 모두 녹아버린 후였다. 뜨거운 에스프레소에 담긴 얼음들은 기대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 후에도 출장 기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아갔던 다른 커피숍에서 몇 번이나 기만적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야 했다.

제2·3차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이행 심의에 참여한 정부대표단의 보고는 마치 스위스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았다. 당사자들의 삶은 점점 악화하고 있는데, 정부 대표단은 겉만 번지르르한 법과 제도들로 협약의 이행을 자화자찬했다.

장애에 대한 사회적 관점, 협약 이행의 기본이다

위원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우려했던 내용은 의료적 모델의 장애개념이었다. 이는 주로 협약 1-4에서 언급된다. CRPD는 전문 (마)항에서 ‘장애’를 개인의 손상과 이를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사회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장애인복지법에서는 여전히 ‘장애’를 개인이 지닌 신체나 정신의 의료적 손상 그 자체로 보고, 장애를 가진 사람을 ‘장애인’으로 명명한다.

정부는 사회적 개념을 도입하기 위해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고 서비스지원종합조사를 도입했다고 앵무새처럼 주장했다. 하지만 의료적 개념은 대중의 장애에 대한 인식에는 물론 장애인과 관련한 정책, 제도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있다.

의료적 개념을 기반으로 한 장애인등록제로 인해, 에이즈 환자나 시청각(중복)장애인들은 사회적으로 많은 장벽을 경험하지만 필요한 서비스를 지원받지 못한다. 서비스지원종합조사는 전체 문항 중 10% 내외만이 장애인의 사회적 환경을 묻고 있다. 장애에 대한 의료적 개념은 장애통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 세계 평균적으로 15%의 인구가 장애를 경험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나 대한민국의 장애인 등록률은 5%에 그친다. 의료적 개념에 의해 장애를 제한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25조 유보철회? 정작 당사자에게 중요한 차별적 국내법 정비는 뒷전이었다

정부는 이어서 25(건강) 마의 유보를 철회하였다는 사실도 위원회에 보고하였다. 대한민국은 상법 제732조를 통해 장애인의 생명보험 가입을 금지하고 있다. 정부는 협약을 비준하던 2008년 이 조항이 국내법과 상충한다는 이유로 비준을 유보하였다. 2014년 1차 최종견해를 통해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대한민국에 제25조(마)의 유보를 철회할 것을 권고하였다.

정부는 두 번째 심의를 앞두고 7년 만에야 제25조(마)의 유보를 철회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국내법과 정책 정비는 전무하다. 심의 현장에서도 한 위원이 상법 제732조에 대한 국내법 정비를 질문했다. 하지만 정부는 다른 답변들로 시간을 보내며 건강조항에 대한 질문은 서면으로 제출하겠다고 했다.

상법 제732조는 여전히 장애인의 생명보험 가입을 제한하고 있다. ‘심신 박약자’, ‘심신 상실자’ 등 협약의 정신에 위반한 용어들을 써가며 장애인을 불완전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게다가 국가보고서는 상법 제732조를 ‘장애인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보고했다.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과 차별을 정당한 보호조치로 당당하게 소개하는 꼴이 부끄러웠다.

장애인 재난 상황 취약계층 아니라더니, 수치를 보고서야 인정하나

정부는 코로나19 사망률과 감염률이 최저수준이라는 뽐내기도 빼놓지 않았다. 수어통역 정보 전달, 장애인 의료지원 및 전문 병원 운영, 백신 우선 접종 조치 등을 장애인을 위한 정부의 조치였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정보 제공에서 누락되고, 코로나에 걸려도 수일간 자택에 방치되거나 시설의 경우 코호트 격리조치 되었으며, 백신 우선 접종 대상에 장애인이 누락된 것에 대해 장애인단체의 강력한 시정 촉구가 있었기 때문에 이뤄진 것들이었다.

한 위원은 코로나19로 인해 장애인의 사망률과 감염률이 매우 높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표단은 “장애인은 기저질환이 많다 보니 건강이 취약하여 감염률도 사망률도 높은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재작년, “장애인을 방역 취약계층으로 분류하는 것은 오히려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라고 발표하던 보건복지부의 입장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11(위기상황과 인도적 차원의 긴급사태)에 대해서는 기후변화 관련 질문도 제기되었다. 기후변화대응 조치 계획 수립 과정에 장애인도 참여하고 있냐는 질문이었다. 정부는 계획 수립 과정에서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 각 계층이 참여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정작 제3차 국가기후변화적응대책 세부 행동계획에 ‘장애인’은 주거 환경 개선과 관련한 내용에서 단 1회 언급되었을 뿐이다.

형식적인 민관협의체, 단순히 장애인 ‘참석’하는 것은 의미 없다

정부는 장애인단체의 의미 있는 참여를 규정하는 제4조(일반의무) 3과 협약의 이행체계 마련을 규정하는 제33조(국내 이행 및 모니터링)와 관련하여 민관협의체를 계속 언급했다. 시민사회는 민관협의체에서 장애인단체는 그저 ‘참석’할 뿐이라며, 정작 ‘결정’에 단체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사례를 위원회에 전했다.

정부는 협약의 범부처 이행을 위해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와 소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고도 보고하였지만, 그 문제점을 미리 파악한 한 위원은 0~3회 개최에 그치는 연간 회의 개최 횟수를 꼬집어 묻기도 했다.

특히 정책결정과정에서 장애아동의 참여를 묻는 말에 대해 정부는 아동참여 보장을 위한 여러 제도들을 나열하였다. 아동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는 상당히 활성화되어있는 의제이다. 문제는 그 속에 비장애아동들만이 아닌 장애아동도 대표성을 갖고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장애아동의 참여를 묻는 말에 비장애아동들만 참여하고 있는 제도를 나열하는 것은 동문서답이나 다름없었다. 아동권리보장원에서 아동위원회 운영에 있어 장애아동을 10~15% 배정하도록 규정한다는 내용은 주목할 만 했지만, 사실상 장애아동, 탈북민 등 소수 아동 모두를 포함한 비율이었고, 운영규정만으로는 지속성을 담보하기 부족하다.

탈시설 정책, 발달장애인 지원 정책, 국가보고서 작성 및 제출까지 모두 기만적이었다

이 밖에도 정부가 모두발언과 심의 답변에서 부각했던 탈시설 로드맵장애인지역사회자립지원 시범사업 운영은 애초부터 ‘시설 폐쇄’가 아닌 ‘시설 개편’을 목적으로 함으로써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대표단은 2014년 대비 장애인복지 부문 예산이 3배 확대되었다고도 보고했지만 애초에 대한민국의 GDP 대비 장애인복지예산이 다른 OECD 국가의 1/3수준이라는 사실은 감춰뒀다. 발달장애인 가족이 연이어 세상을 등지는 사건에 대해 정부 대표단은 애도를 표하면서도 발달장애인에 대한 서비스사업들을 나열했다. 보고서를 제출하는 행태도 기만적이었는데, 시민사회나 위원회가 충분히 검토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심의 이틀 전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국가보고서를 토대로 반박보고서를 작성해야하는 시민사회에게는 국가보고서에 대해 사전에 의견을 구하지도, 공개하지도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맑은 제네바의 하늘과 다르게 이상할 만큼 무거웠던 유엔 회의장의 공기와 그곳의 기만적이었던 것들을 기억하고 기록했다. 정부는 그럴 듯 해 보이는 법과 제도, 서비스를 돌림노래처럼 열거했다. 시민사회는 많은 법과 사업에도, 보이지 않고, 누락되고, 지워지는 당사자의 삶을 전했다. 제27차 심의가 마무리되는 제네바의 9월 9일, 대한민국 제2-3차 최종견해가 발표될 예정이다. 시민사회는 최종견해를 살펴보며, 협약에 근거하여 국내법과 제도를 점검해 나갈 것이다. 한국 정부는 기만적으로 협약을 이행하는 ‘척’을 멈추고, 협약을 올바로 이해하고 당사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정책을 시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더인디고 조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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