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오늘] 그림일기의 추억이 꿈으로 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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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에 여러 형태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Unsplash
▲노트에 여러 형태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Unsplash

[더인디고=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아무리 봐도 국민학교 1학년 솜씨가 아이다. 이거 니가 한 거 맞나? 정직하게 대답해라.”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겁먹은 나는 눈만 껌벅거렸다. 재차 묻는 선생님의 독촉에 나는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했다.

“언니가 해 줬어요.”

나는 방학 숙제였던 일기 쓰기가 내 힘으로 하지 않았다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하지만 억울함이 컸다. 그림 일기장에 글만 써 놓은 걸 중학생 언니가 보고 그림을 그려주었을 뿐이었다. 공기놀이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실물 같았다. 내가 봐도 여덟 살 아이의 솜씨는 아니었다.

1970년대 초등학교 시절에는 방학 숙제가 참 많았다. 식물채집, 곤충채집, 그리기, 만들기 등 내 힘으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언니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책 읽기와 일기 쓰기는 충실히 했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 글만 써 놓았던 일기를 언니가 그림을 그려 넣어줬다.

방학 숙제 가운데 잘 된 것들은 복도에 진열하여 모든 학생이 보게 했다. 내 일기장을 본 선생님들이 초등 1학년 솜씨가 아니라고 수상자 명단에서 지워버렸다. 그림만 도움받았는데, 글은 내가 썼는데 나는 상으로 받을 뻔했던 공책 세 권을 놓치고 오랫동안 아까워했다.

2학년이 돼서는 그림 없이 글로만 쓰는 일기가 참 좋았다. 일기장 검사 후 빨간 볼펜 선생님의 첨삭에 나는 늘 입이 귀에 걸렸다. 내 일기를 읽은 선생님은 모든 상황이 그려진다며 칭찬을 많이 했다. 칭찬 중독에 나는 더 열심히 일기를 썼다. 일기를 쓰기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루를 반성하고 새로울 것 없는 다짐을 하는 순간들은 어린 내가 나에게 주는 용기였고 희망이었다.

중1 때 내 일기를 본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집안 사정이 딱한 걸 알았다며 힘든 일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겉표지가 예쁜 양장본의 일기장을 선물로 받았다. 일기를 잘 쓰려고 색다른 일도 해 보았다. 완행열차를 타고 송정이나 일광 바다를 보고 왔고 영화도 보면서 일기를 쓰기 위해 하루를 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일기 쓰던 습관이 고교 때부터 사라졌다. 검사를 안 하니까 재미가 없었다. 누군가가 일기를 통해 말을 걸어 주길 기대했는데 독백이 되어버린 일기는 재미가 없었다. 가끔 내 마음을 털어놓으며 일기는 주기가 되고 월기로 변해갔다.

연애하면서 다시 일기를 썼다. 매일 일기장이 아닌 편지지에 기록해서 지금의 남편에게 보냈다. 연애하면서 주고받았던 편지는 다섯 권의 파일이 되었다. 책꽂이에서 잠자고 있다가 꼭 이사 때가 되면 먼지를 털어내며 읽곤 했다. 유치했지만 그때의 일들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학창 시절의 일기장은 결혼하면서 챙기지 못했더니 친정집 수리하면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딸아이의 초등학교 때 쓴 일기장을 보면 찾을 수 없는 나의 일기장이 생각나 많이 아쉽다.

SNS를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기록이 참 재미있었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쓰나 싶을 정도로 솔직한 글들을 읽으며 나도 용기를 냈다. 댓글과 답글을 주고받으며 소통하다 보니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과 친해졌다. 재밌다며 내 글을 기다린다는 사람도 생겼다.

책을 내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내가 정말 글을 좀 쓰나 생각도 들었다. 누구나 그렇듯 나의 삶도 평탄하지 않았으니 살아온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동안 써온 글들을 정리했고 출판 관련인과 구체적인 얘기도 해봤다. 그것은 내가 덤벼들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의 사적 얘기가 남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여기저기서 책 발간한다는 소식과 책을 팔기 위해 안간힘 쓰는 경우도 보았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란 걸 확인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해졌다. SNS만으로 글 쓰는 게 재밌고 소통하는 것이 즐거우니 그걸로 족하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 저자와의 교류도 가능한 온라인 세상은 어느덧 내게 참새 방앗간이 되었다.

초1 때 언니가 그려준 그림으로 일기 상을 받지 못한 추억이 나의 욕심을 잠재운다. 하고 싶은 일이 남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그건 때가 아닌 것이다. 무턱대고 내 욕심대로 책을 낸다면 세상의 외면을 감당하기 힘들어 우울할 것 같다. 진정 내가 원하는 일은 좀 더 아껴서 정말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까지 꿈으로 간직하련다. 꿈이 현실 되는 날이 오면 좋고 안 와도 그만인 나의 삶을 응원한다.

[더인디고 THE INDIGO]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 행복을 나누면서 따뜻한 사회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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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na@naver.com'
famina
1 year ago

최고 ~~그런역사가 있었군요~
방학숙제중 일기쓰기가 젤 싫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