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오늘] 통장 만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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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창구에서의 모습 ⓒ픽사베이
▲은행 창구에서의 모습 ⓒ픽사베이

[더인디고=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아들 복지카드가 훼손되어 재발급을 해야 했다. 주민센터에 두어 달 전 신청했는데 카드가 오지 않아 문의했더니 S 은행 계좌를 다시 만들어 오라 했다.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니 이내 눈으로 변했다가 다시 거센 비로 돌변하던 날, 아들과 함께 은행으로 갔다. 일 보러 다닐 때 눈이나 비가 오면 성가시다. 물기가 몸에 닿으면 극도로 싫어하는 자폐인 아들, 이제 아무렇지 않은 듯 차에 타고 내리면서 어깨에 비를 맞아도 개의치 않았다. 아들의 성장이 흐뭇했다. 우리 동네에는 그 은행 지점이 없어서 옆 동네로 갔더니 주차할 곳이 없어 뱅뱅 돌다가 다시 검색하고 다른 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곳으로 갔다.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에 인감 등록과 통장은 만들어 놓으라고 어린 엄마들에게 자주 말해 왔다. 자녀 대신 부모가 뭐든 가능했던 미성년 시기를 놓치면 본인 대동해도 의사 표현이 안 된다고 옥신각신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주민센터든 은행 직원이든 본인 확인 절차가 담당자마다 달라서 까다롭다. 후견인을 언급하기도 하고 본인이 사인 정도만 해도 순조롭게 진행하기도 하니 장애인의 관공서나 금융 관련 일은 담당자 재량이 커 보인다.

점심시간이 끝났을 두 시쯤이라선지 은행은 사람들로 붐볐다. 간편 업무 번호표에 15명의 대기자가 있었다. 아들은 소파에 편한 자세로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 ATM 기계 앞에 안내문이 보였다. 입출금 업무와 신규개설을 할 수 있다는 글에 본인 확인을 기계로 한다는 게 미심쩍어 청원경찰에게 물었다.

“신규개설이 기계로 가능해요?”

“아니요, 창구에서 하세요.”

“그럼 왜 여기 신규개설 안내가 되어 있죠?”

“그건…”

안내문이 최근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제법 낡아 보였는데 그분은 말끝을 흐리며 대답을 피했다. 다시 아들 옆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렸다.

“요즘도 0원 통장 발급해 주나요?”

대기 시간이 길어져서 지루하던 차 안내 데스크로 가서 물었다. 동전을 분류해서 세고 있던 청원경찰이 고개도 들지 않고 ‘네’ 대답했다. 평소 휴대폰 케이스에 나와 아들 신분증, 신용카드 한 장 달랑 넣어 다니면서 현금은 사용하지 않기에 워낙 많은 것이 빨리 변하는 세상이라 혹시나 해서 물어 확인했다. 한 시간여 기다려 내 차례가 되었다. 아들은 그대로 소파에 앉아 있고 나만 창구 앞으로 갔다. 장애인이 통장 개설하려면 평소 신분증으로 사용하는 복지카드와 다른 신분증이 있어야 한단다. 순간 짜증이 확 밀려왔지만 그냥 돌아서기엔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 참았다. 장애인은 신분 확인을 두 배로 해야 하냐며 따지지 않았다. 차별이라고 열 올리지도 않았다. 다른 방법이 없겠냐고 점잖게 말했더니 본부에 알아본다면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굳이 그렇게 까다롭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설명을 하고 있었다. 직원은 그래도 내가 못미더웠는지 나와 아들과의 관계를 증명하는 서류가 필요하다고 했다. 다행히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주민등록 등본이 있어 보여줬다. 일이 진행되는 듯하여 내가 물었다.

“장애인이 보호자와 함께 통장 만들러 오는 일이 없었나요? 처음 하는 업무처럼 다른 곳에 문의도 하고 그러시네요.”

“가급적 해 드리려고 확인한 겁니다.”

직원이 웃으며 말하길래 나도 살짝 거짓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로서는 꼭 해야 할 일이기에 툴툴거리면 안 되는 거였다. 아들이 사인해야 할 내용이 무척 많았다. 문제가 생겼을 때 법적 책임을 지지 않으려면 ‘동의합니다’에 체크해야만 되는 것들, 나도 자세히 읽지 않은 항목을 아들에게 사인하라면서 ‘이게 뭐 하는 거지?’ 싶었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아들은 창구 앞으로 다가와 사인하는 데 협조했다. 대여섯 번 하더니 뒤로 물러서며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보였다. ‘그래, 이만큼 한 것도 너로선 큰맘 먹은 거지’ 싶었는데 다행히 할 건 다 한 후였다.

“0원 통장 발급은 안 되니까 100원이라도 입금하셔야 합니다.”

아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차 안의 비상금을 가지러 출입구 쪽으로 가는데 아들이 황급히 따라 나왔다.

“차에 가서 돈 가져올게, 넌 그냥 있어라.”

와중에 아들의 이런 반응이 반가웠다. 엄마가 들어오든 나가든 멀뚱하게 바라보거나 아무 반응 없던 때가 있었기에. 직원이 일하는 걸 보다가 나지막이 말해줬다.

“안내하시는 분이 0원 통장 발급된다고 하던데 바뀌었다고 말해주면 좋겠어요. 대기하는 시간에 느긋하게 준비하면 되니까요.”

직원은 웃으며 알겠다고 말하며 동전이 많이 들어와 정신없어서 잘못 말했나 보다고 했다.

어렵게 만든 통장을 들고 주민센터로 가서 보류되었던 복지카드 재신청을 마무리했다. 카드 회사와의 본인 확인 절차가 또 까다로웠다. 아들과 보호자가 옆에 있어 주민센터 직원이 직접 통화하면서 그나마 무난하게 끝낼 수 있었다.

이렇게 철저히 본인 확인에 서류 제출 등 엄격하게 처리하는데 보이스 피싱이나 금융 사기는 멈추질 않는 게 신기하다. 얼마나 더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할까 싶고 그들로 인해 우리 같은 사람들이 더 불편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게 화가 난다. 악행 하는 이들 때문에 높아만 가는 사회 신뢰 비용 생각하면 어려운 이들의 복지에 쓰일 자원이 버려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아들과의 동행으로 일을 보는 것이 과거와 달리 그나마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게 위로가 된 날이었다.

[더인디고 THE INDIGO]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 행복을 나누면서 따뜻한 사회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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