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오늘] 인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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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 ⓒ픽사베이
▲모래시계 ⓒ픽사베이

[더인디고=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우리 집은 여인숙 해. 엄마 혼자 그거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셔.”

허름한 동네에 살던 어린 시절, ‘여인숙’이란 간판을 보면 여행객들이 하룻밤 머무는 숙소 정도로만 생각했다. 새로 전학 온 친구가 자기 집에 가자고 했을 때 **여인숙 이란 간판을 보고 놀랐다. 지나치기만 했던 그곳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 어색했다. 친구 엄마는 좁은 방에 우릴 들어가라 했고 썰렁한 방바닥 위에 이불을 깔아 주셨다. 푹신할 거라는 나의 생각이 멈췄다. 버석거리는 느낌에 손바닥으로 요를 비벼보니 속에 비닐이 있었다.

“아, 그거 이불을 비닐로 싸고 홑청을 입힌 거야. 그렇게 안 하면 매일 이불 빨아야 해서 엄마가 힘들대. 홑청만 벗겨서 세탁하면 되니까.”

친구는 그게 정답인 듯 설명하고는 만화책을 한 보따리 들고 왔다. 잠자면서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거렸을 비닐 이불, 투숙객들의 잠자리가 그리 편하지 않았겠다는 생각을 어린 내가 했던 것 같다.

중학생이 되어 버스를 타고 등하교할 때 창밖으로 보이는 이웃 동네에서 ○○여관이나 ##장 등의 건물이 내가 봐왔던 여인숙보다 컸다는 이유만으로 조금 나은 숙소려니 생각했다. 그 후로 많은 곳이 모텔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걸 보았다. 역 근처에 특히 밀집되어 있는 모텔로 인해 여인숙이라는 이름은 기억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이강산 작가의 다큐일기 “인간의 시간”은 작가가 여인숙에 기거하면서 쓴 367일간의 기록이다. 삶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려는 사진작가에게 가장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선뜻 마음을 내놓지 않는다. 일찌감치 이를 감지한 작가는 그들과 함께 살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 나간다. 가족에게 버림받거나 늙고 병든 사람들이 술과 담배로 인간의 시간을 버텨내는 여인숙 달방(월세방) 사람들을 보면서 작가는 사진보다 이들의 삶에 집중한다. 인권과 공존을 실천하며 후원자들을 모으고 자신의 꿈을 위해 모아뒀던 거금 2천만 원도 이들을 위해 내놓는다. 하루 두 끼 밥으로 추위와 더위를 이겨내며 살아가는 이들의 시간, 먹고 배출하는 기본적인 삶은 세끼 밥과 다양한 간식을 섭취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책을 읽는 내내 아직도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나 불편했다. 나의 어린 시절도 궁핍 그 자체였지만 세상이 많이 변했기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다. 하지만 작가의 일기에 담겨있는 희로애락에 나의 불편함이 오만임을 금방 깨달았다. 그 안에는 사랑도 있고 웃음도 있었다. 모임방이 된 주차장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에는 세상 근심 걱정 없는 행복이 보였다. 늙고 병들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몸싸움도 벌이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이 밝으면 각자의 하루를 시작하고 각자의 시간을 살아내는 그들이었다.

이강산 작가는 자신의 사진 작업은 인간의 생존 공간을 탐구하는 것이라 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집이 없었기 때문에 잦은 이사를 하면서 가졌던 꿈이었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방학 때가 되면 전국의 여인숙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겉모습만 담는 게 아니라 그들 속으로 들어가 함께 머물지 않으면 찍을 수 없는 사진들을 촬영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작업을 위해 작가는 평탄한 삶을 보장하는 교사 생활을 접었다. 아내와의 갈등이 이제는 후원 동반자로 함께 할 수 있다니 반갑고 감사하다.

반짝 관심으로 끝나더라도 지인들의 관심을 끌려고 나도 12월 독서모임 책을 ‘인간의 시간’으로 정했다. 참 고맙게도 지인들의 후원이 있었다. 연말이라 어디에 후원할지 생각한 분들의 행동은 나비효과를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 어디서든 누군가의 관심이 약자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관여한다면 한 끼 식사로 웃을 수 있는 그들을 생각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 모든 것을 그들의 책임으로만 돌리고 외면하는 사회는 정의로운가? 물질적 풍요로움은 대물림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자들의 특권인가? 사회의 불평등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인식한다면 가족에게 버림받거나 의지할 곳 없는 약자들의 삶은 언제나 죽음 곁에 있다.

연말이다. 여인숙에서 달방으로 살거나 호화스러운 집에서 호사 누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신은 공평하게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을 배정했다. 모두의 하루가 나름의 소중한 시간이 되려면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이다. 나와 다른 환경에서 사는 이들을 돌아보는 연말이면 좋겠다. 다름이 불편한 건 내 안의 따뜻한 공감 세포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다. 작은 것이라도 나눈다면 그 불편함이 조금은 사라지지 않겠냐는 이기심의 발로가 치졸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누군가의 배고픔이 조금이라도 해결된다면 의미 있는 일이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 한다는 말로 치부할 게 아니라, 값싼 동정심보다 필요한 것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추운 연말을 녹이는 인류애 아니겠는가.

[더인디고 THE INDIGO]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 행복을 나누면서 따뜻한 사회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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