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를 말하다] 대안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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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 인식이라는 글자가 퍼즐 안에 쓰여 있다. ⓒ픽사베이
▲자폐 인식이라는 글자가 퍼즐 안에 쓰여 있다. ⓒ픽사베이
  • 윤은호의 ‘왜 자폐당사자는 죄송해야 할까?’ 열두 번째 이야기

[더인디고 = 윤은호 집필위원]  

윤은호 더인디고 집필위원
윤은호 더인디고 집필위원

지금까지의 비판을 보고 “늘 비판만 하면 쓰나, 대안을 같이 제시해야지.”라고 말할 분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대안은 있고,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늘어놓아 볼까 한다.

2071년 6월 18일 새벽. 정아령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아. 그렇지. 퍼뜩 생각하고는 곧바로 문을 연다. 기다리는 수민의 얼굴이 보인다. “몇 시야.” 하고 물었다.

“여섯 시 삼십 분이야.”

곧바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아침부터 준비해야 하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령은 (사)한국자폐신경다양인협회 팀장이었고, 오늘은 협회에서 주관하는 제50회 한국 자폐인 긍지의 날 행사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협회 회원들이 석 달가량 준비했던 행사가 진행되는 날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곧바로 씻기 위해 몸을 일으키면서 아령은 그동안 자기 삶에 벌어졌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아령은 우연하게도 2031년 6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자신이 자폐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령이 신경전형인으로 자라나길 바라셨다. 초등학교 땐가 이상한 모습을 본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한 번인가 자폐 진단을 받을 것을 권했지만 역시 이번에도 어머님이 거절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아령은 자신의 정체성을 깜빡 모른 채, 외톨이 같으면서도 어느 정도의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때쯤인가 신설된 청소년 의무 정신상담제도를 통해 자신이 자폐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이 자폐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등록하기 망설여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부모님도 등록에 반대했다. 다행히 장애인복지법과 발달장애인법이 개정되면서 청소년 이상의 자폐인의 경우 부모의 반대와 독립하여 자신의 등록 여부를 정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한 자폐나 사회소통장애를 의심하는 경우 그 진단비를 국가가 보장하는 발달장애인법 개정이 이뤄지면서 더 이상 자폐로 인해 고통을 느낄 필요도 없어지게 되었다.

등록 이후에도 정부의 돌봄과 지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2030년대 들어 지속적인 인구 감소 및 높아지는 장애인 인권 국제기준으로 인해 정부는 더 이상 ‘발달장애인’을 시설에 방치하거나 특수교육 및 저임금 일자리에 둘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대신에 이들을 적절히 교육해 일자리로 배치한다면 세금 감소 및 일자리 해소에 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처음에 발달장애인 대상 일자리를 강화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발달장애인’의 생산성이 비장애인보다 낮다는 깊은 편견을 가진 기업들은 여전히 이행강제금을 내면서 고용을 거부하였다. 한편 자폐인 중 대학원 진학자가 늘어나면서 고학력 장애인의 일자리 요구가 늘어났으나 신체감각장애인 중심의 일자리 제공 및 정신적 장애인의 저임금 일자리 도출을 중심 정책으로 삼던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이러한 요구를 지속적으로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자폐인들과 신경다양인들은 고용공단과 교육부 등을 상대로 투쟁에 나서는 한편,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에 이를 제소하며 문제 제기에 나섰다.

다행히 자폐인들의 노력과 입법부 및 행정부의 장애수용성 개선으로 인해 정부는 정신적 장애인 고등교육 강화 및 장애인 고용 장려금 대폭 강화를 통한 <장애인 사회통합을 위한 교육·고용·개인주거 증진정책>을 발표하고, 국회는 관련 법을 재·개정해 이를 실행으로 옮겼다. 장애계뿐만 아니라 여러 이해당사자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하지만 정부의 뚝심 있는 강단으로 장애인들은 지역사회에서 일자리에 통합되면서 업무를 지속해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곧이어 자폐인 의무고용률에 정신적 장애인 30% 의무할당제가 추가되어 더 많은 자폐인과 신경다양인이 공공기관 등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후에도 불합리한 기준으로 인해 장애인에서 제외된 자폐성 장애인들의 장애인성을 어떻게 인정할 것인지 또한 논의의 대상이었다. 자폐인의 등록 확대에 대해서는 논의가 많았지만, 2017년 ‘장애인 등급제 폐지’에서도, 제6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에 따른 ‘장애의 사회적 모델’에 따른 ‘장애인 등록 기준 변화’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는 좁은 자폐인 등록 기준을 고집했다. 그러나 2030년대 들어 자폐인들의 강력한 노력과 신경다양인들의 연대를 통해 정부는 마침내 DSM-5 기준의 자폐인과 사회소통장애인을 자폐성 장애인으로 모두 인정했다. ADHD를 포함한 신경다양인 또한 장애인 지원기준에 들어섰음 은 물론이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때쯤, 자폐인과 신경다양인을 일반 회사에서 더 자주 마주치게 된 기업에서는 갈등과 장애 대상 괴롭힘이 더 심해져만 갔다. 특히 장애로 등록되지 않았던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회사들은 과도한 업무를 부여하거나, 신경전형적 소통 기준을 강요하는 등의 갖가지 수법으로 자폐인들을 회사에서 몰아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자폐인들과 정신장애인, 신경다양인들이 다시 세종시로 모였다. 이들은 노동조합을 구성하고 있지 않았지만 estas와 세바다, 기타 ADHD 커뮤니티를 통해 연락망을 갖추고 있었다. 수만 명의 당사자들이 한날한시에 세종시로 모이자 의외로 전국의 노동현장이 위기에 빠지면서 정부는 자폐인과 신경다양인을 대상으로 하는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정책을 제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책 이외의 영역에서도 한국 자폐인과 신경다양인들의 성장이 뛰어났다. 국내 자폐인들이 학술 전역에 들어서며 기존의 학계 관행을 변혁시켰고, 그 과정에서 한국연구재단의 장애인 차별 행태가 드러나며 한국연구재단은 장애인 대상 트랙을 전 지원사업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폐스러움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 철폐가 이뤄지자 유명 학자 중 상당수가 자폐인임을 드러냈고, 그제서야 교육부와 대학은 자폐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체계를 구축하였다.

한편 미등록 자폐인들의 교직 이수가 늘어나며 자폐교사 및 ADHD 교사의 수가 늘어나면서 2030년대에는 신경다양성교원노동조합이 형성되었다. 그러자 대학 진학자 감소로 고생하던 사범대들은 마침내 자폐인이 교직과정을 이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제서야 진주교대 사건 이후로도 해소되지 않았던 자폐인 교대 입학 금지 조치를 해소하였다.

한편 교통 관련 업무분야에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이어졌다. 2030년대 중반부터 자폐인과 신경다양인들이 항공대 및 교통학과 진학을 시도했으나 국토교통부는 적성검사 기준을 높이며 자폐인의 철도·항공 운전직 진입을 막는 데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2050년대 자폐인과 신경다양인 대상 업무 직무 보조기기가 개발되고, 장애인식 개선으로 더 이상 모든 장애인이 모든 직업에서 배제될 수 없다는 국민의 의견이 형성되면서, 국토교통부는 결국 불합리한 체제를 시정하게 되었다.

특히 2040년대부터 철기연이 개발한 하이퍼튜브가 실용단계에 들어서면서부터 자폐인들의 업무 부담이 줄어들게 되고, 위험도가 낮아지면서 하이퍼튜브를 바탕으로 많은 자폐인이 철도인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폐인들이 한국철도공사를 비롯한 철도회사 직원의 상당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철도기업들은 자폐인들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뭐가 또 있었는데…

똑똑. 아직 안 씻었어요?

아, 그렇지!

“지금 몇 시에요?”

씻으면서 그동안 자폐인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던 아령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나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오늘은 정말로 행사를 잘 해내야지. 아령은 그렇게 다시 다짐했다.

▲성인자폐(성)당사자 자치 자조모임인 ‘estas’와 세바다는 6월 18일 ‘자폐인 긍지의 날’을 맞아 17일부터 기념행사 등을 개최했다. /사진=estas
▲성인자폐(성)당사자 자치 자조모임인 ‘estas’와 세바다는 6월 18일 ‘자폐인 긍지의 날’을 맞아 17일부터 기념행사 등을 개최했다. /사진=es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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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문화경영학과 초빙교수] 한국의 첫 자폐 연구자이자 지식생산자로서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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