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구멍 난 바지는 내 삶을 구멍 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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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밥이 풀어진 청바지. ⓒ픽사베이
▲실밥이 풀어진 청바지. ⓒ픽사베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새 옷을 입고 나서는 아침은 아주 어릴 적 등굣길이나 지금의 출근길이나 즐겁다. 다른 날과 다르게 왠지 공기가 상쾌한 것 같기도 하고 심장박동이 경쾌해진 것 같기도 하다. 살짝 바뀐 내 모습이지만 부쩍 멋지게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내 변화를 알아줄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기대하기도 한다.

선물 받은 청바지를 처음으로 입고 출근하던 첫날도 그랬다. 날씨는 여전히 더웠지만, 괜스레 시원해진 것 같고 얇은 바지 덕분에 몸도 가벼워진 것만 같았다. ‘옷 하나에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면 진작 하나 살걸!’이라 생각하며 아파트 현관을 나선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내 기분의 방향은 예상 못 한 사건으로 급격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안전한 보행을 위해 차도 반대쪽 화단으로 붙어 걷던 탓에 바지가 살짝 담벼락에 닿았는데 무슨 날카로운 물건이라도 있었는지 ‘부욱!’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 옆 부분이 찢어져 버렸다. 설마설마하며 조심스레 다리를 더듬어 보았지만 ‘아닐 거야!’라는 기대는 보기 좋게 틀렸다고 큰 구멍이 말해주고 있었다.

금세 공기가 무거워진 것 같고 마음도 따라서 가라앉고 있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엔 출근 시간이 늦어질 것 같아서 가던 길을 재촉했지만. 구멍은 더 커지는 것 같고 다른 이들이 내 바지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은 이 사태가 벌어진 이유로 스멀스멀 보이지 않는 내 눈이 떠오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시력이 좋았다면 굳이 담장 쪽으로 붙어 걷지 않았을 것이고 날카로운 물건이 있었다 하더라도 자연스레 비껴갈 수 있었을 것만 같았다. 사람들도 구멍 난 내 바지와 보이지 않는 내 눈의 처지를 묶어서 각자의 소설을 쓰고 있는 것만 같고 나 자신도 갑자기 작아지는 나를 느꼈다.

눈이 보였다면 지금의 나보다는 새 바지를 입은 첫날부터 찢을 확률이 분명히 낮아지긴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확률의 차이일 뿐 다른 이들에게도 나 같은 사건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과 옷을 찢는 것이 매우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면 나에게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야 했지만 내게도 이런 사건은 오늘을 제외하면 거의 일어나지 않았었다. 내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보행로에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 날카로운 물건이 화단에 놓여 있었고 마침 그날 아침에 입은 청바지는 그것을 견뎌낼 수 없을 만큼 얇았기 때문이다.

익숙한 출근길에서 낮아진 경계심은 나 아닌 누구라도 그런 일을 마주할 가능성을 만들었을 것이고 난 그저 조금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내 눈은 내가 가진 신체 중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라는 이유로 사건이 일어난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의심받았을 뿐 그것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 만약 내 눈이 그 일이 일어나게 될 조금의 가능성을 높였다 하더라도 난 나를 위해 그런 생각들을 지양해야만 한다. 난 보이지 않기에 다른 이들의 보행보다는 조금은 위험한 환경에 노출될 수 있지만 모든 불편함이 시력 나쁜 눈 때문이라 여겨진다면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 편이 낫다.

시력이 좋지 않다면 다른 이들보다 조심성을 키우면 되고 지팡이를 꼼꼼하게 짚으면 된다. 안전한 보행로를 찾아다니면 되고 뾰족하게 튀어나온 물건들은 다음부터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개선을 요구하면 된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길을 걷지만, 난 다른 이들에 비해 그다지 크게 힘들지는 않다. 그렇게 생각해야 오늘도 내일도 또 다른 날도 기쁜 마음으로 출근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다만 바라지 않던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 가장 아픈 손가락이 따끔거렸을 뿐이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구멍 난 내 바지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난 새 바지처럼 꿰매어진 멋진 바지를 며칠 만에 다시 입을 수 있었고 만약 이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면 쿨하게 또 다른 새 바지를 살 수도 있었다. 내겐 어떠한 큰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내게 일어난 작은 사건도 긴 시간 지나지 않아 모두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장애와 함께 사는 이들의 하루하루는 조금 불편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장애가 원인은 아니다. 때때로 장애가 다소 그 불편함의 원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스스로 괜찮아야 한다. 가난한 이들의 모든 삶이 가난이 아니듯 힘없는 이들의 모든 걸음이 부족함이 아니듯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을 장애로 뒤덮어서는 안 된다. 살다 보면 때때로 원치 않는 상황을 마주하는 것이고 그때 우리가 먼저 해야 하는 생각은 ‘약점 때문에…’가 아니라 ‘괜찮아! 별일 아니야!’이다.

자신의 삶을 작은 약점으로 모두 덮어버릴 것인지 특별한 것 없는 작은 다름으로 만들 것인지는 그런 연습으로부터 시작된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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