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파리의 김치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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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식탁에서 숯불구이를 준비하는 장면. ⓒUnsplash
▲한국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식탁에서 숯불구이를 준비하는 장면. ⓒUnsplash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낯선 도전에 대한 설렘이 많은 편이다. 여행지를 갈 때도 가보지 않은 곳을 선호하고 음식 메뉴를 정할 때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에 끌림을 느낀다. 때로는 무모한 선택이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움으로 돌아올 때도 있지만 그조차 특별한 경험이기에 내겐 진한 만족스러움으로 남곤 한다.

이번 프랑스 여행에서도 내가 원한 식단은 철저한 현지식이었다. 딱딱한 바게트에 진한 향내 풍기는 양 치즈로 아침을 열고, 빨간 육즙 가득한 스테이크에 타닌감 가득한 까베르네 소비뇽 곁들인 만찬을 즐기는 것을 꿈꿨다. 헤밍웨이가 작품을 구상했다는 어느 카페에서 진한 핫초코 한잔 마시는 것도, 샹들리에 거리 쇼윈도를 알록달록 수놓은 마카롱 하나 베어 무는 것도 동네 골목 어귀에서 파는 크레페 하나 집어 먹는 것도 내겐 설렘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국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고 먹기 힘들다는 현지인들만 가는 독특한 식당도 찾아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여정에서 내 모든 욕구만으로 일정을 채울 수는 없다.

특히 장인어른과 장모님 모시고 가는 칠순 기념 여행에서는 그럴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아내의 배려로 내 취향은 적절한 방법으로 해소되고 있었지만, 며칠에 한 번쯤은 한인 식당을 방문해야 했다. 김치찌개, 갈비찜, 순두부찌개를 몇만 원씩 주고 해외에서 먹는다는 것은 솔직한 내 심정으로는 반갑지 않았다. 하지만 70년 이상 한식을 드신 장인어른의 어려움을 모르는 체할 수는 없었다. 한글로 표기된 메뉴판과 한국말 하는 점원은 편안함이기도 했지만, 이국땅의 낯섦을 찾기 좋아하는 나 같은 이들에겐 아쉬운 시간이기도 했다. 한식 재료 구하기 힘든 파리에서의 한국 음식이 얼마나 맛있겠냐는 의심도 있었지만, 국내에서의 경험으로 프랑스 레스토랑의 현지식이 좀 더 고급스러울 것 같다는 막연한 사대주의가 있었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려웠다.

밥을 한 숟가락 뜨고 김치찌개와 갈비를 한 점 먹었을 때 생각보다 맛이 괜찮다고 느꼈다. 좀 더 크게 밥을 뜨고 집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찌개 깊숙이 숟가락을 밀어 넣어 국물에 재료를 가득 담아 입안 한가득 찌개 한 숟가락을 넣었다. 맛있었다. 정말 맛있었다. 내 손에 들려있는 수저의 움직임은 점점 격렬히 바빠지고 밥과 반찬은 급격히 줄어갔다. “밥은 얼마든지 더 드립니다.”라는 점원의 말과 “이것 좀 더 드실래요?”라는 아내의 말은 그저 감동이었다. 순식간에 두 그릇 넘는 밥과 상을 가득 채웠던 반찬이 바닥을 드러냈다. 배는 부르고 에너지가 솟고 기분마저 좋아졌다. 3만 원쯤 하는 김치찌개의 가격이 비슷한 가격의 스테이크에 비해 과소평가 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국내에서 외식할 때도 굳이 찾아가서 먹지 않던 김치찌개가 나를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어 줄지는 몰랐다. 그렇다고 파리에서 내가 방문한 한식집이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맛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낯섦으로 가득 찬 먼 이국땅에서 비로소 내게 가장 익숙한 것에 대한 감사를 찾은 것이다.

고소한 빵들과 색다른 음식들이 내게 새로운 자극으로 다가와 잠시간 기쁠 수는 있지만 나 같은 토종 한국인이 그런 것들만 먹고 매일을 살기는 힘들 것이다. 매일 밥, 국, 김치만 먹는다고 불평하던 때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을 매일 먹을 수 있음이 내겐 행복이었다. 낯선 다름이 반갑고 새롭게 느껴진다는 것은 그 동안 나를 채워준 익숙한 감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의 출근도 항상 곁에 있는 아내도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을 것만 같은 가족도 연락만 하면 달려올 것 같은 오랜 친구들도 동네 골목에 오래된 슈퍼마켓마저도 너무나 익숙해서 잊고 지내온 것일 뿐 내게 가장 감사한 존재들이다.

매일 세 번씩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은 기적의 음식임이 틀림없다. 너무도 까맣게 잊고 지내던 나를 둘러싼 밥 같은 기적들에 감사해야 한다. 여행 중 한식의 매력에 빠져버린 나는 그 전의 여행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토종음식과의 사랑을 나누었다. 어른들 비상용으로 준비한 사발면, 누룽지, 고추장, 햇반, 김치, 반찬들은 하루에 한 번 이상 내 배 속을 채우고 바닥을 드러내어 버렸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내는 다음 여행에서는 우리끼리 오더라도 꼭 이런 것들을 준비해 오자고 제안했다. 파리의 김치찌개는 여행이 내게 준 또 다른 선물이었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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