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오늘] 자격증보다는 몸 편한 노후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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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는 노인 ⓒ픽사베이
▲책을 보는 노인 ⓒ픽사베이

[더인디고=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여자라고 공부 안 시켜준 부모를 원망만 하고 살았는데 이거라도 따고 보이까 공부는 누가 시키는 기 아이라 내가 하면 되는 거였더라.”

형님(셋째 동서)의 말이 내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가난한 부모 원망했던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울컥했다. 시가 식구 모임 장소에서 평소 말수가 적은 형님은 편안한 얼굴로 조근조근 자신의 근황을 얘기했다. 칠순 나이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한 번 만에 따다니 대단한 일이었다. 동서 다섯이 모인 ‘정가네 며느리들’ 대화방에서 꼭 답해야 할 말이나 자신의 의견은 형님의 딸(조카)이 대신하는 것 같았다. 조카가 엄마를 대신해서 글을 올리는 걸로 보아 형님이 휴대폰 문자 쓰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 옆에 학교가 있었는데 동생들 챙기라고 학교도 안 보내고, 엄마가 밭일 나간다고 공부시간에 깐난쟁이를 학교에 두고 가삐모 그기 또 챙피해가꼬 동생 들쳐 업고 고마 집으로 가삐따 아이가.”

그 시절 고만고만했던 집안 사정(가장의 두 집 살림, 첩 들이는 일 등)이나 아들의 들러리로 살았던 수많은 딸들의 이야기는 점점 잊혀 가고 있다. 하지만 내 기억에는 2대 독자인 오빠 아래로 딸이 일곱이나 있었으니 황제 대접 받던 오빠와 우리 자매들의 차별 대우가 일상이었어도 그러려니 하고 살았던 날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결혼 후 어느 해 명절에 잔뜩 쌓여있는 설거지를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서 하면서

“업으로 이런 일 하는 사람들은 참 힘들겠어요.”

라고 했더니

“동서처럼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이런 일을 왜 하노?”

라는 형님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형님은 자신이 식당 일을 하는 건 공부를 많이 안 했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은행에서 일한다고 공부 많이 한 사람으로 보였다니 의외였다.

상고 출신으로 은행원이었던 나는 대졸자와 고졸자가 확연히 갈리는 분위기를 느끼며 학벌 콤플렉스가 심했다. 같은 해 입행했어도 시작부터 5급과 6급으로 달랐고 20대 초반의 우리보다 기본 4년이 많은 나이의 위압감도 있었다. 사내에서 이뤄지는 결혼도 대졸끼리, 고졸끼리 맺어지기가 쉬웠다. 야간대학에 다니는 사람도 많았지만 졸업해도 입행 당시의 학력은 바뀌지 않았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보다 대학이라는 곳의 분위기가 궁금했고 학사모를 쓰고 싶었던 나는 40대 초반에 02학번으로 방송대에 입학했다. 자폐성 장애인 아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중학생 딸아이와 송파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점심으로 모녀가 매점에서 사 먹는 컵라면과 김밥은 꿀맛이었다. 딸은 공부하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했고 공부하란 말 한 번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 모습을 보는 게 나는 또 흐뭇했다.

출석 수업 듣는 기간은 하루 종일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어도 힘든 줄 몰랐고 식판에 받아먹는 값싼 학식은 정말 맛있었다. 중간고사 보느라 출석 시험 치르는 것도 즐거웠다. 보육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1년을 미뤄 5년 만에 졸업하고 보니 주위에 대학원 출신에 석박사가 많았다. 대학원 진학을 잠깐 고민했지만, 학벌을 위한 공부로 비싼 수업료 버리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바로 접었다.

형님이 요양보호사 자격을 딴 건 이유가 있었다. 폐암인 남편(시숙)이 노인요양등급을 받고 하루 두어 시간 방문하는 요양사가 형님에게 자격증을 따라고 종용했다. ‘내가 어떻게?’라고 생각하다가 조카의 설득에 도전했고 취득에 성공했다니 참 대단한 형님이다.

나도 보육교사, 청소년지도사, 사회복지사 등 국가자격증과 다른 민간자격증도 많지만 지금 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다 헛짓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그런 것들을 위해 성실하게 살았던 건 인정하자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현명한 형님은 가족을 돌보며 생활비에 보탬도 되니 얼마나 뿌듯할까.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으면 요양보호사 시험에 유리하다니 나도 도전해 볼지 싶은 생각이 든다. 한편으론 가족 돌봄의 폐단이 있기도 하고 돌봄을 받을 나이에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것이 과연 복지국가의 노년인가 씁쓸하기도 하다.

글자를 배우고 자신의 일상을 시로 표현하면서 노년의 일상이 풍요로워졌던 ‘칠곡 가시나들’ 다큐멘터리 영화가 생각난다. 지난한 과거를 시로 만들어 현재를 즐겁게 사는 어르신들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나의 미래도 저런 모습이면 노인의 4고(빈곤, 질병, 고독, 무위)도 잘 견딜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살아 있다면 피할 수 없는 누군가의 노후가 다른 누군가의 병시중이 아니라 오롯이 자신만을 챙기면서 살 수 있는, 몸이라도 편한 세상이면 좋겠다.

[더인디고 THE INDIGO]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 행복을 나누면서 따뜻한 사회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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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34c6ef59067@exam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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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nymph@naver.com'
최대남
7 months ago

작가님의 잔잔한
일상에서 느끼는 진솔한
스토리 전개가 편안하고 따듯하게 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