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호의 차별 속으로] 고의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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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은행 열매 3개가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김소하 작가
▲동그란 은행 열매 3개가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김소하 작가

[더인디고=이민호 집필위원]

이민호 집필위원
▲이민호 더인디고 집필위원

푸른 하늘과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은 산책하기 참 좋은 계절이다. 오늘도 가을 정취를 만끽한다는 기대에 부풀어 길을 나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대는 깨졌다. 바닥에 떨어진 은행나무 열매 때문이다. 가을을 느끼기는커녕 은행 열매를 피하느라 눈과 마음이 바닥에 집중되었다.

은행을 밟으면 온종일 특유의 냄새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두 개의 신발로 보행하는 비장애인들도 곤혹스럽겠지만, 네 개의 바퀴가 달린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은 훨씬 더 곤혹스럽다.

신발보다 바닥에 닿는 면적이 더 넓은 것이 바퀴이고 휠체어 탄 상태로는 보행로에 상에 있는 물체를 뛰어넘거나 돌아가기가 어려우므로 속절없이 은행을 밟을 수밖에 없다. 바퀴에 엉겨 붙은 은행을 스스로 떼어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온종일 쿰쿰한 냄새를 풍기며 일상생활을 해야 한다.

은행을 밟고 사무실에 들어가면 누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괜히 마음에 걸린다. 버스, 지하철, 특별교통수단 등을 이용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실제 슬쩍슬쩍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진다.

얼마 전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로 향했다.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출입구 앞에서 주저했다. 휠체어 바퀴로 은행을 잔뜩 밟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맡아도 냄새가 지독했다. 네 개의 바퀴를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달리 해결 방법이 없었다. 깊게 숨을 마시며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자리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살펴보는데 손님들이 불쾌하다는 눈치를 보냈다.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는 셈이다.

대중이 모이는 장소에서의 눈치야 정신력(?)으로 버티면 되지만, 휠체어를 타고 내가 사는 방에 들어올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은행 밟은 신발로 방을 누비는 것과 같은 상황인데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것이다.

특히 외출이 없는 주말 전 금요일 날 휠체어를 방안에 두면 2일 동안 은행 냄새와 불편하고 불쾌한 동거를 해야 한다. 휠체어나 스쿠터를 이용하는 장애인 당사자들이 더 크게 느낄 수 있는 불편함인데, 사회적 편견이나 불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장애인들은 냄새난다는 편견 말이다.

2019년 미국 경제전문 매거진 INC닷컴이 한 기업에서 미국인 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첫인상 결정에 걸리는 시간은 평균 27초라고 전했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69%, 즉 미국인 10명 중 7명은 대화를 나누기 전에 이미 첫인상을 결정짓는다고 했다. 응답자의 83%는 상대방의 자신감에서 상대방을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지만 나쁜 냄새(66%)가 나거나 오만한 태도(62%)를 보이고 혹은 복장이 불량(49%)하면 나쁜 첫인상을 남길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첫 만남에서 불쾌한 냄새를 풍기면 첫인상이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냄새는 냄새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한 평생의 이미지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은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추운 겨울 홍차에 마들렌 과자를 적셔 한입 베어 문 순간, 어릴 적 숙모가 내어주던 마들렌 향기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 기억은 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집필로 이어졌다. 이후 향기가 기억을 끌어내는 것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부르게 됐다.

이스라엘 와이즈만 연구소의 야라 예슈런 박사는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에 향기와 기억 간의 연관성을 추적한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16명의 성인에게 특정 사진을 보여주는 동시에 달콤한 배나 눅눅한 곰팡내를 맡게 했다. 일주일 뒤 여러 가지 냄새를 맡게 하면서 뇌의 활동을 촬영했다.

실험 결과, 참가자들은 일주일 전 두 번의 실험 중 첫 번째 맡았던 냄새에 노출될 때 봤던 사진을 더 잘 기억했다. 첫 번째 맡은 냄새 중에는 곰팡내처럼 기분 나쁜 냄새에 더 강력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예슈런 박사는 실험 결과를 토대로 “뇌는 좋든 싫든 가장 먼저 맡았던 냄새의 기억을 각인한다”며 “나쁜 냄새에 대한 기억이 더 강한 것은 진화 과정에서 상한 음식물과 물, 천적의 냄새를 빨리 알아차려야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좋은 날 이런 고민을 하는 것도 우울하지만 떼려야 뗄 수 없는 은행 냄새가 장애인을 피해야 할 존재로 만들 것 같아 걱정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대구 지역 다릿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권익옹호 팀장으로 활동하는 장애인 당사자입니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장애 인권 이슈를 ‘더인디고’를 통해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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