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장애학생의 ‘교육’은 ‘배려’가 아닌 ‘권리 보장’

0
260
장애학생의 교육은 ‘배려’가 아닌 ‘권리 보장’부터
▲현재 장애 부모들은 교사들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공포에 질려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도 괜찮은 걸까? 학교에 보내도 괜찮은 걸까? 어쩌면 이 트라우마는 극복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본문 중에서...> ⓒ 픽사베이
  • 교육당국의 원칙 없는 지원이 장애학생을 ‘배려나 혜택’의 대상으로 움츠리게 한다

[더인디고]

전라북도 전주에 사는 이창호 씨는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시민이며, 페이스북에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며 겪을 수밖에 없는 경험들과 불합리한 장애정책들을 지적하고 개선안을 제안하는 ‘아빠일기’를 부정기적으로 연재하고 있다. 더인디고는 2023년 11월 13일 페이스북에 게재된 ‘아빠일기’에 공감하고 이창호 씨의 허락 하에 전면 게재한다.

#아빠일기

인터뷰를 마치고 특수학급 신설부터, 중도·중복 장애학생의 의료적 지원까지를 돌아보았다. 학교는 ‘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교육청은 자의적으로 만든 ‘3인 이상, 3년 유지’라는 신설 규정을 이유로 특수학급 신설을 거절했다. 중도·중복 장애학생의 의료적 지원 또한 2017년에 이미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차별 권고를 받고 교육부가 이를 시정하고 대책을 수립하기로 했지만, 2024년 입학 대상자였던 중도·중복 장애학생에게 2025년 개교 예정인 병원학교와 재택순회교육을 말하며 우회적으로 학교 입학을 거절했다.

사람들은 흔히 장애인이 특별한 배려와 혜택을 받는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공간이 없어서 특수학급을 신설할 수 없다고 말하는 학교에는 방과후교실이 수십 개가 넘고, 영어교실은 3개뿐만 아니라, 영어놀이터도 있다. 2021년, 학생 건강권 보장을 이유로 ‘학교보건법’이 개정되며 의무 시행된 과대학교(36학급 이상) 보건교사 2인 배치는 2023년 9월 기준 1,362개 학교 중 825개(60.5%)가 시행되고 있다. 이조차도 의무를 다 이행하지 않았다고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특수학교는 어떤가? 중도·중복 장애학생의 의료적 지원을 보장하겠다며 시행된 ‘제 5차 특수교육발전 5개년 계획(2018~2022)’에는 보건교사 배치를 확대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시범학교는 광주은혜학교 단 한 곳뿐이었다. 현재 2인의 보건교사가 배치된 특수학교는 몇 개교인가?

3주 전 국감에서 더불어민주당의 김영호 의원은 서거석 전북교육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북의 경우 소아청소년 당뇨 환자가 119명인데 보건 인력은 단 한 명도 없다.” “소아당뇨는 제1형, 제2형을 가리지 않고 학교가 돌보지 않으면 부모가 직장도 다닐 수 없는 심각한 문제.” 중도중복장애학생의 의료적 지원을 요구하며 우리가 한 말과 동일했다. 전북교육청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라고 답했다. 서거석 전북교육감은 국감장에서 이렇게 답변했다. “즉시배치 하겠다.”

방과후교실, 특별실과 과대학교 보건교사 2인 배치, 소아당뇨를 위한 보건 인력 등 모두 아이들의 돌봄과 교육, 건강권을 위해 필요한 조치다. 이는 우리 사회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계속 확장되어야 할 제도들이다. 그런데 그 원칙이 장애 학생에게도 동일하게 지켜지고 있는가? 어째서 특수학급은 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신, 증설을 거부하고, 보건교사와 의료인력에 대한 장애학생의 필요는 비현실적인 요구가 되는가? 정말 장애인은 특혜와 배려를 받고 있는가? 2건의 기자회견 동안, 나는 내가 특수한 요구가 아니라 보편적인 원칙에 대해 말했다고 생각한다.

용인 아동학대 의심 사건이 처음 알려졌을 때를 다시 되짚어 본다. 사람들은 특수교사의 배려로 학폭위가 아닌 개별화 회의가 열렸다고, 강제 전학이 아닌 특수학급 분리로 끝난 건 장애인에 대한 불공정한 특권이라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오히려 학폭위가 열렸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배려나 특권이 아니라, 원칙을 지키지 않은 사건이었다. 언론에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개별화 회의에 참여 권한이 없는 피해 학생의 부모가 참여해 ‘분리 조치’를 요구했다. 이는 사실상 이 회의가 개별화 회의가 아닌 학폭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학폭위가 열렸다면 어땠을까? 정말 사람들의 말대로 비장애학생처럼 강제전학을 당해야 공정한 결과인 걸까? 그렇지 않다. 비록 법전문가는 아니지만, 우리 사회는 행위만 놓고 처벌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그 행위의 의도는 무엇인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모두 규명하고 합당한 처벌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내 행위의 결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등을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중요한 고려 요소다. 장애 또한 그러한 고려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이는 장애, 비장애 모두에게 적용되는 동일한 원칙일 뿐, 장애가 특권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애 부모들은 학폭위를 두려워한다. 왜 그런가? 위에서 말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를 이미 많이 경험해보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과밀이었음에도 특수학급 증설 의무가 지켜지지 않았고, 개인에게 활동지원사를 요구하는 등 많은 원칙들이 지켜지지 않았다. 과연 장애인은 우리 사회로부터 특별한 배려와 혜택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지키기로 약속한 보편적 원칙에서조차 배제되고 있는가?

장애 부모들의 분노와 원망이 담긴 말, “당신도 장애 자식 한번 낳아서 키워 봐.”는 사실 어떤 일말의 기대와 신뢰도 함께 담겨 있는 말이다. 당신이 지금 내 삶의 맥락과 처지를 몰라서 그렇지, 알면 달라질 것이라는. 분명히 나와 내 아이를 이해해줄 것이라는 믿음. 그러나 용인 사건에 쏟아진 장애 혐오의 말들은 그런 장애 부모들의 마지막 믿음까지 모두 부숴버렸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우리 삶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아예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느낀 것이다. 현재 장애 부모들은 교사들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공포에 질려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도 괜찮은 걸까? 학교에 보내도 괜찮은 걸까? 어쩌면 이 트라우마는 극복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 긍정적인 것은 사건 이후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논의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시스템에 대한 비판은 너무 쉽다는 것이다. 이 비판이 나 자신에게도 향하는가? 반성 없는 비판은 변화를 촉구하기 어렵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면,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이 시스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혹시 장애인 친구 있으시냐”는 물음은 사실 나에게 물은 질문이기도 했다. 없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나는 통합교육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 내게 장애인 친구가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를 부끄럽게 한 건, 장애인 친구 하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해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는 것, 단 한 번도 이상한 일이라 여겨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내가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친구가 되는 상상을 하기란 어렵다. 그게 나와 우리 세대의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제대로 된 통합교육을 할 수 있다면, 우리 다음 세대는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 우리는 다시 믿어야 한다. 공포를 딛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다시 세상을 믿고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야 한다. 우리가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 사회의 원칙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우리를 억압하는 허위적인 현실 원칙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가장 보편적인 원칙. 지금까지 나는 어떤 배려와 혜택을 요구한 적 없다. 그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지켜달라고 말했을 뿐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더인디고 THEIND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승인
알림
6632cf0386caf@example.com'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