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겸손과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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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트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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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지하철 문이 닫히기 직전 중학생쯤 보이는 남학생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 들어왔다. 얼마나 열심히 달렸는지 정리도 되지 않은 숨을 헉헉대던 그는 미처 탑승하지 못한 문밖의 친구들에게 득의양양한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아쉬워하는 친구들의 반응을 보며 그 순간만은 스스로가 꽤 우월한 성취를 경험한 대단한 승자라도 된 듯한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앞 차와의 간격 조정을 위해 1분간 더 정차하겠습니다.”

예상 못 한 방송이 나오고 그의 친구들이 다시 열린 문으로 우르르 들어왔을 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승자와 패자로 나뉘었던 그들의 입장은 정반대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게 뭘 그렇게 숨찰 정도로 신나게 뛰어가냐? 결국 우리랑 같이 갈 거면서!”

“의리 없이 혼자 먼저 타면 좀 낫냐?”

번갈아 한마디씩 하는 다수의 채근으로 먼저 탑승했던 학생은 몇 정거장이 더 가는 동안 동네북이 되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먼저 갈 수 있는 부지런함은 분명 장점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우쭐댈 필요까지는 없었다. 오늘처럼 문이 다시 열릴 수도 있고 설령 지하철이 평소처럼 그대로 출발했다 하더라도 다음 지하철을 타는 것이 먼저 가는 지하철을 타는 것에 비해 유의미하게 나쁜 선택은 아니다. 일행들은 목적지에서 어차피 만날 것이고 어쩌면 먼저 탄 지하철이 불행하게도 좋지 않은 일을 만날 수도 있다. 현재 내가 있는 위치가 다른 이들에 비해 조금 낫다는 것은 모든 시간 모든 공간에서 나의 존재를 우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어릴 적 깍두기공책에 한글 공부를 시작했을 때 난 한석봉처럼 명필이 된 줄 알았다. 또박또박 칸 맞춰 쓰인 나의 글씨는 제법 질서가 있어 보였다. 어머니 아버지나 선생님의 필체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일이 뭐 이리 쉬운가 하는 착각도 했다.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한 두 해쯤 지나서 가로줄만 있는 새 공책을 받았을 때 내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었음을 조금씩 깨달았다. 가로세로 칸에 맞추기만 하면 되던 공책과 달리 새 공책에서는 띄어쓰기나 글자 간의 간격을 나 스스로 만들어 가야 했다. 일정하게 글자의 크기도 들쑥날쑥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뭔가 한글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아무런 구분 줄이 없는 연습장을 받아들었을 때의 그 혼란스러움은 이전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차분하게 한 글자 한 글자 적어가도 문장이 되면 그 기울기가 놀이터 미끄럼처럼 아래로 기울어졌다. 또 적고 또다시 적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던 날들이 지나가고 줄 없는 공책에도 익숙해질 때쯤에야 어머니 아버지나 선생님의 글씨가 얼마나 예쁜지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깍두기공책 쓰던 꼬꼬마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글씨 쓰는 실력이 나아졌지만, 마음가짐은 한껏 겸손해졌다. 나의 우쭐댐이 머지않아 또 다른 부끄러움이 될 수 있다는 세상 이치를 조금은 알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예를 배우고 여러 디자인을 접하면서 어떤 글씨는 일부러 기울이거나 흘려쓰기도 하고 두껍게도 얇게도 쓴다는 것을 알았다. 내 글씨는 전보다 조금 더 나아졌지만 그럴수록 마음가짐은 더 겸손해졌다.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다 보면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변한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하곤 한다. 공부 잘한다고 으스대던 녀석은 말 못 한 사연으로 어려운 삶을 살고 천덕꾸러기 녀석은 그럴듯한 사업체를 경영하고 있다. 자리 안 가리고 힘자랑하던 친구도 일 년 내내 감기 달고 살던 아이도 20년 지난 요즘 보면 그 입장이 예전과는 다르다. 떵떵거리며 잘 나가는 이도 오늘 하루 끼니마저 걱정되는 사람도 그것은 지금 그리고 오늘의 일일 뿐이다.

지하철 한 대 먼저 탄 중학생이나 그 친구들처럼 우린 지금 조금 운이 좋거나 또 조금 나쁠 뿐이다. 문은 금방 다시 열릴 수도 있고 다음 차를 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 오늘 조금 운이 좋다고 으스대는 것은 깍두기공책 사용하면서 한석봉인 척 으스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내일은 더 나아질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으스대지 말고 겸손해지자! 실망하지 말고 기대하자! 사는 것이 재미난 것은 예측하기 힘든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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