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경의 컬처 토크] 무엇이 길버트를 갉아 먹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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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죽음을 알게된 어니가 엄마 일어나라며 소리치는 영화의 한 장면. 사진=유튜브 캡처
▲엄마의 죽음을 알게된 어니가 "엄마 일어나"라며 소리치는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의 한 장면. 사진=유튜브 캡처

  •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1993)

[더인디고=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더인디고 편집위원

최근 어느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한 참가자의 사연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지금껏 수많은 스포츠경기장에서 애창돼 오던 응원가 ‘질풍가도’를 불렀다는 그의 등장은 보는 이들을 일제히 반가움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다듬지 않은 은백의 새치와 평범한 차림에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선 어쩐지 고통스러운 시간의 무게가 느껴졌다. 탁월한 가창력에 많은 이들이 애창하는 대표곡을 가지고 있지만 이름 없는 가수로 잊혀야 했던 그의 사연은 방송 이후 많은 화제가 되었다. 아픈 누나에 이어 연달아 병석에 누운 부모님까지 돌보느라 그간 가수 활동을 할 수 없었다는 그의 사연. 그를 통해 젊은 나이에 혼자서 아픈 가족을 돌봐야 하는 우리 사회 ‘영 케어러’의 실상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무명가수라는 틀을 벗어 버리고 이제 막 이름을 다시 찾을 새로운 기회 앞에 서게 됐지만 그는 또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운명은 이제 그의 몸마저 망가뜨리는 것으로 그가 지나온 고통의 시간을 돌려주었다. 인생 참 잔인하다! 그의 좌절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를 다시 보았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는 아픈 엄마와 지적장애가 있는 동생을 돌봐야 했던 영 케어러이자 젊은 가장 길버트 그레이프의 이야기다. 피터 헤지스의 동명소설 ‘What’s Eating Gilbert Grape’를 영화화한 것으로(원작자인 피터 헤지스가 각색을 맡았다) 원제는 ‘무엇이 길버트 그레이프를 갉아먹는가?’쯤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갉아 먹는다’는 표현이 그 시절 죠니뎁의 빛나는 모습과는 왠지 잘 어울리지 않지만 서두에 언급한 그 불운한 가수 영 케어러의 모습과는 너무 잘 어울려서 어쩐지 쓸쓸해지기까지 한다.

아이오와의 작은 마을 앤도라에서 길버트 그레이프는 작은 식료품 가게 점원으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젊은 가장이다. 엄마 보니는 남편이 지하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후 그 충격으로 섭식장애를 앓으며 초고도 비만이 되어 집안에 붙박여 산다. 모든 것을 아들인 길버트에게만 맡기고 의지한 채 자신의 육중한 몸무게 때문에 마루가 내려앉는 줄도 모른 채 자신의 슬픔에만 갇혀 있다. 누나인 에이미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여동생 앨런이 있지만 지적장애가 있는 막냇동생 어니(무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다!)를 돌보고 책임져야 하는 것은 언제나 길버트의 몫이다. 의사는 어니가 고작 10살을 넘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이제 곧 18살이 되는 어니는 가족 모두에게 기적이다. 그러나 늘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어서 길버트에겐 항상 애먹이고 긴장시키는 애물단지다. 가족의 무게를 혼자서 감당해내야 하는 길버트는 늘 힘겹고 마음 둘 곳이 없다. 답답한 삶의 일탈로 이웃에 사는 카버부인과 불륜을 즐기지만 진정한 위안은 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작은 위안처럼 숨구멍처럼 또한 구원처럼 베키가 왔다. 캠핑카를 타고 어느 날 이 마을로 여행을 온 낯선 여행자 베키는 그에게 신선하고 자유로운 존재 그 자체다. 숫 사마귀처럼 가족에게 갉아 먹히고 있는 길버트에게 베키는 어떻게 구원이 되었을까.

엄마 보니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서서히 내려앉고 있는 것은 그 집 마루만은 아니다. 가족의 무게에 못 이겨 길버트도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던 것. 그러나 오롯이 길버트에게만 떠맡겨진 채 그의 가족은 마을에서 철저히 방치되고 소외되어 있다. 누구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그 가족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길버트의 친구들은 새로운 프렌차이즈점에 취직을 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도전과 꿈으로 설레는데 길버트는 대형마트에 밀려 이젠 기울어가는 동네 슈퍼 일 말고는 다른 일을 생각해 볼 수도 없다. 늘 위험한 높은 곳에 기어 올라가는 탓에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막내 어니는 거의 그의 족쇄나 다름없고. 엄마 보니가 초고도 비만이 되어가는 동안 그녀를 비아냥대고 조롱할 뿐 그 누구도 그녀를 걱정해 주거나 그녀의 트라우마를 치료할 전문가의 손길도 닿지 않는다. 카버 부인과의 은밀한 관계도 도피처는커녕 결국 육체적인 쾌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허무한 관계일 뿐 길버트의 곁엔 진정한 어른도 없다. 그러나 베키는 달랐다. 형인 길버트도 바꿀 수 없었던 어니의 물공포증도 베키는 다정하고 여유롭게 변화시킬 수 있었고 엄마 보니에게 진심을 다 했으며 무엇보다 길버트에게 다른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시선과 용기를 주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베키의 차를 타고 떠나는 길버트와 어니의 행복한 모습으로.

2024년의 길버트들은 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돌봐야 하는 가족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너무나 많은 책임과 의무에 갉아 먹히지 않고 끝까지 빛나는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 돌봄의 책임을 개인인 길버트들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가 나눠 질 수는 있는 진일보한 궁리와 논의를 더 치열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아픈 가족을 돌보다 결국 자기 몸까지 상해버린 한 무명 가수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먼먼 옛이야기가 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지금 힘겨운 시간을 버티고 있는 수많은 길버트들에게 ‘질풍가도’ 응원가를 힘차게 불러주고 싶다.

[더인디고 THE INDIGO]

라디오 방송과 칼럼을 쓰고 인권 강의를 하면서 나름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을 걸어왔습니다. ‘easy like Sunday morning...’ 이 노래 가사처럼 기왕이면 일요일 아침처럼 편안하게 문화를 통한 장애 이야기로 말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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