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거북이는 느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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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람과 키 큰 사람이 똑같은 높이의 발판 위에서 축구를 관람하는 그림 ‘기회의 평등(그림 좌측)’과 키가 작은 사람에게 키 큰 사람과 같은 높이에서 볼 수 있게 발판을 그에 맞춰 지원한 그림 ‘결과의 평등(그림 우측)’을 나란히 배치한 그림 /유튜브 캡처
▲키 작은 사람과 키 큰 사람이 똑같은 높이의 발판 위에서 축구를 관람하는 그림 ‘기회의 평등(그림 좌측)’과 키가 작은 사람에게 키 큰 사람과 같은 높이에서 볼 수 있게 발판을 그에 맞춰 지원한 그림 ‘결과의 평등(그림 우측)’을 나란히 배치한 그림 /유튜브 캡처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동화 속 거북이는 쿨쿨 잠들어버린 오만한 토끼와의 경주에서 성실함을 무기로 산꼭대기에 먼저 오르는 기적을 보여주지만 현실 장면에서 그런 아름다운 결말은 기대할 수 없다. 만약 토끼가 하루 절반 이상을 잠으로 채워야 하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북이가 닌자 거북이 같은 유전자 변형종이 아니라면 산을 오르는 경주에서 패배할 확률은 없다.

평생 산에 갈 일도 갈 필요도 없는 거북이가 산꼭대기를 오른다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일정한 거리마다 거북이의 몸을 적셔줄 충분한 수로가 존재하는 산이라 하더라도 끼니때마다 먹이를 나눠주는 친절한 등산객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거북이의 수명이 백 년을 훌쩍 넘긴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생존해 있는 동안 정상에 다다른다는 것은 세상 끝 바다를 향하는 달팽이나 하늘 날기를 바라는 거위처럼 그저 아름다운 도전 이상의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아름다운 동화 나라에서 거북이는 승자라는 영예를 얻음과 동시에 꾸준하고 성실함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결국 느림보 인증을 피할 수 없었다. 토끼가 또다시 잠에 빠지지 않는다면! 거북이가 한숨도 돌리지 못하고 하루 종일을 애쓰지 않는다면! 그나마도 동화 속 같은 제한된 공간이 아니라면 거북이는 토끼를 이길 수 없다. 다시 경주가 열린다면 우리 중 누구도 거북이의 승리에 배팅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기차나 전자제품의 계기판에 거북이가 떴을 때 ‘아! 느리지만 성실하고 꾸준하게 동작한다는 뜻이구나!’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 거북이는 멋지게 이긴 것처럼 보였지만 느림보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거북이는 느리지 않다. 거북이의 헤엄치는 속도는 평균 20km 정도 되고 일부 종은 시속 30km를 훌쩍 넘기는 빠른 속도로 바닷속을 움직이기도 한다. 토끼나 사람보다는 당연히 빠르고 물에 사는 동물 중에서도 특별히 느리지 않다.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기적을 바라지 않더라도 평균 정도의 성취를 이뤄내는 것은 몹시 어렵지 않다.

바닷속을 기준으로 동화가 쓰였다면 토끼와 거북이의 처지는 완벽히 뒤바뀌었을 것이다. 실제로 별주부전의 토끼는 바닷속에서만큼은 거북이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다. 바닷속 어느 세상에 전자제품이 있다면 동작이 느려지거나 고장위험이 있을 때 거북이 대신 토끼가 그 아이콘으로 사용될지도 모르겠다. 거북이는 다른 물고기들과 달리 물 밖에서도 느리더라도 움직일 수 있지만 토끼는 물속 깊은 곳에서는 아예 생활할 수 없으므로 토끼 아이콘은 느림이 아닌 사용 불가의 표시로 쓰일 수도 있겠다.

토끼와 거북이 경주는 애초부터 배경설정이 이기적이고 차별적이고 폭력적이다. 둘의 경주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산꼭대기까지 연결된 물길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거북이가 느릴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달리기시키는 것은 너무나 폭력적이다. 잠도 자지 못하고 물도 먹지 못하고 몇 배의 노력으로 달려야만 성과를 낼 수 있는 설계는 명백한 차별이다. 그것을 아름다운 동화로 포장하는 것도 육지를 사는 동물들의 이기적 동정일 뿐이다.

거북이에겐 느림보라는 낙인만 남았다. 육지에서도 물속에서도 하늘에서도 빠른 동물은 없다. 거북이가 육지에서 토끼를 이기기 위해 끙끙대며 애쓸 필요도 없다. 거북이는 느리지 않다. 다만 그가 빠를 수 있는 물길을 우리가 준비하지 못했을 뿐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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