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찬의 기자노트]일상의 소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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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시력 시각장애인은 지도앱을 통해서도, 직접 눈으로도 ‘약국’의 간판을 확인하기 쉽지 않다. 사진. ©박관찬 기자

[더인디고 박관찬 기자] 아침에 샤워하면서 면도를 하기 위해 면도기의 칼날을 덮고 있는 뚜껑을 열었다. 전날까지 사용하던 면도기의 칼날이 많이 닳아서 새로운 면도기를 꺼낸 건데, 다른 면도기와 달리 뚜껑이 단단히 닫혀 있어서 쉽게 열리지 않았다. 조금 힘을 줘서 뚜껑을 열다가 왼손 엄지손가락 부분이 칼날에 제대로 베이고 말았다.

샤워기의 물줄기가 몸에 흐르는 상황이라 그런지 피가 나오는 것 같지 않았고, 살짝 따끔한 정도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면도를 하고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는데, 분명히 수건으로 몸을 다 닦았는데도 왼손 엄지손가락은 축축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 거였다. 오른손으로 헤어드라이기를 잡고 왼손으로 머리를 정리하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헤어드라이기를 끄고 왼손을 확인하니 그때서야 엄지손가락에서 피가 맺혀 나오고 있었다.

머리를 말리고,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머리에 왁스를 바르는 과정부터 불편함이 시작됐다. 아침을 먹기 위해 냄비를 왼손으로 들 때도 통증이 왔다. 하필 이날은 검도를 배우러 가는 날인데, 죽도의 손잡이도 왼손 엄지손가락이 잘 받쳐줘야 한다. 첼로도 왼손이 음정을 정확하게 짚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엄지손가락이 첼로의 지판을 튼튼히 받쳐줘야 한다. 심지어 노트에 뭔가를 적을 때, 노트가 흔들리지 않도록 왼손이 노트를 잡으려고 하니, 어느새 왼손 엄지손가락이 노트의 한 부분을 짚고 있다. 통증이 온다.

칼날이 손가락에 베인 아주 작은 상처 하나가 일상의 소소한 부분조차도 불편하게 만든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집을 나섰다. 약국에 가서 대일밴드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약국은 한 번도 혼자 가본 적이 없다. 약국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정도만 알고 있다. 두 군데가 있는데, 모두 지인과 함께 가본 적이 있어서 그 약국을 갈 참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두 군데의 약국 모두 문을 닫고 있다. 다른 약국을 찾아서 시장 쪽으로 걸어가 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시장 쪽이라 분명히 약국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을 텐데, 저시력인 탓에 지도는 물론 직접 눈으로 약국의 간판을 확인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고민하다가 이전에 살던 동네에 있던 약국을 떠올렸다. 어느 노부부가 운영하는 듯한 그 약국은 4년동안 그 동네에 살며 오가는 길에 지나던 곳이다.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365일 내내 영업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문닫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오후에 활동지원사가 출근하니까 그때 같이 약국에 갈까 싶었지만, 그때까지 불편한 왼손 컨디션으로 보내기보다 대일밴드를 사서 좋은 컨디션으로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 길로 문이 닫힌 동네 약국에서 이전 동네 약국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약국까지 걸어서만 30분이다.

30분을 걸어서 도착한 약국은 역시 영업 중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 카운터로 간 뒤 약사에게 말했다. 대일밴드 하나 달라고.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생긴 카운터의 유리벽은 내 시력으로 약사의 표정이 잘 안 보이는 환경을 제공해 준다. 그래서 유리벽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대일밴드 하나 달라고 했는데, 그제서야 약사의 얼굴이 보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고만 있다.

이전 동네에 사는 동안 몇 번 가봤기 때문에 난 노부부 약사가 잘 안 들린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좀 더 큰 소리로 대일밴드 하나 달라고 말했고, 약사는 그제야 대일밴드를 찾아서 건네주신다. 유리벽 중 어딘가에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잘 들리도록 구멍이 숑숑 나 있을 텐데, 내 눈에는 모두 구멍없는 유리로만 보여서 찾지 못했다. 그래서 유리벽에 대고 말해서 약사가 잘 듣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약국을 나서면서 휴대폰을 보니 대일밴드 결제한 내역이 문자로 왔다. 1,000원. 물가가 꾸준히 오르는 이 와중에 대일밴드 가격은 참 착하다. 더구나 이 대일밴드 상자 안에는 대일밴드가 무려 22개나 들어있다. 이게 단돈 1,000원이라니. 한편으로는 좀 어이없다. 이 1,000원을 위해 왕복 1시간을 투자한 내가 좀 우습다.

지도앱을 볼 수 있고 눈이 조금 보인다면, 하다못해 알고 있던 두 곳의 약국 중 어느 한 곳이라도 문을 열었다면 분명 쉽고 빠르게 대일밴드를 왼손 엄지손가락에 붙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게 ‘시청각장애가 있어서’라는 구차한 변명따윈 하고 싶지 않다. 왕복 1시간을 걸은 덕분에 이른 시간부터 하루 만보 걷기를 달성했고, 무엇보다도 혼자 약국을 방문해서 대일밴드를 왼손 엄지손가락에 붙였다.

검도를 할 때 왼손이 죽도를 잘 잡아주고, 첼로 연습을 할 때도 왼손가락들이 짚는 음정이 좋은 진동을 내도록 엄지손가락이 지판을 잪 받쳐주고, 취재를 준비하기 위해 노트에 무언가를 적을 때도 왼손에 아무 문제없이 노트를 잘 지탱해 주고 있다.

오늘 기자노트에는 그래서 딱 여섯 글자만 기록한다. ‘일상의 소중함’.

[더인디고 박관찬 기자 p306kc@naver.com]

시청각장애를 가지고 있고 대구대학에서 장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첼로를 연주하며 강연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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