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찬의 기자노트]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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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에 필담을 적고 있는 사진
마곡선검도관 선강원 관장님은 급증을 수여할 때, 시청각장애가 있는 기자의 손에 급증에 적힌 내용을 직접 적어줬다. ©마곡선검도관

[더인디고=박관찬 기자] 초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6학년 전체 학생들이 학교 급식소에서 졸업식 연습을 한 적이 있다. 사실 뭘 하는 상황인지도 모른 채 학생들이 다 나가길래 기자도 따라갔던 기억이 난다. 급식소에서 졸업식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냥 학생들이 하는 걸 보면서 국민의례, 애국가 제창 등 평소 학급 조회시간에 하던 걸 하면 되기에 큰 어려움이나 불편함은 없었다.

그런데 졸업식 연습을 하던 어느 시점에서 내 옆에 있던 학생이 팔로 날 툭툭 치면서 앞으로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앞으로 나갔는데, 알고 보니 졸업생 중 대표로 상을 받게 된 것이었다. 앞으로 나가니 강단 위 교장선생님이 서 있어야 하는 곳에는 6학년 3반 담임 선생님이 서서 교장선생님 역할을 대행하고 계셨다. 당시 난 6학년 2반이었다.

그 선생님은 내 얼굴을 보며 뭐라뭐라 말했고, 곧이어 상장 대신 종이 한 장을 내게 건넸다.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그 종이를 받고 선생님에게 인사도 했고 뒤돌아서 학생들에게 인사도 했다. 그런 다음 자리로 돌아갔는데, 옆에 있는 학생이 다시 팔을 툭툭 치는 바람에 한 번 더 나가서 시뮬레이션을 또 했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학생들을 대표해서 상을 받게 되었으니까. 학교에서 어렵고 불편했던 시간들이 있었어도, 지금 돌아보면 그때 상을 ‘받았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결과적으로 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상을 받는 연습도 하고 마음의 준비(?)도 했고,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상 받게 되었다고 자랑했지만, 결과는 아니었다.

졸업식 날 학생을 대표해서 상을 받은 학생은 박관찬이 아닌 다른 학생이었다. 연습할 때는 분명히 내가 받았는데 졸업식 당일에는 왜 변경되었는지 설명조차 없었다. 졸업식 연습대로 상 받을 순서가 되어서 앞으로 나가려는데, 다른 학생이 나가는 걸 보고 멈칫했던 기분, 그리고 아무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그냥 자리에 앉아야만 했던 기분은 아무도 헤아려 주지 않았다.

지레짐작이지만 졸업식 연습에서 교장선생님 역할을 담당했던 6학년 3반 담임이면서 6학년 전체 체육 담당이기도 했던 그 선생님은 체육시간에도 뭐가 못마땅한지 자주 내게 와서 큰 소리로 뭐라고 한 적이 많았다. 내게 장애가 있다는 걸 이해하기보다 자기 할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듣지 못하는데도 계속 자기 할 말만 할 리가 없을 테니까.

심사 결과보다 기억에 남는 승급증 수여

검도를 배우기 시작한 지 5개월이 되어 첫 번째 심사를 받았다. 어려운 부분도 있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만큼 즐겁게 운동하고 수련했기 때문에 후회없이 최선을 다해 심사에 임했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수용하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앞으로도 열심히 배울 생각이었다. 특히 첫 번째 심사 후 검도가 더 좋아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첫 번째 심사가 있은 뒤 두 번째로 검도관에 수련을 갔던 날, 그날도 평소처럼 관장님의 지도를 받으며 얼굴에 땀방울을 송골송골 맺히며 수련을 했다. 요즘 배우는 연격은 정말 재미있으면서도 많은 운동량을 요구해서 그런지, 또 그 기술 안에 많은 집중력을 필요로 해서 그런지 이전 수련보다 많은 에너지를 발산하게 되는 것 같다.

수련이 끝나고 관장님과 마주 보고 무릎을 꿇고 앉은 뒤 평소처럼 그날 배웠던 걸 돌아보며 잠시 묵상을 했다. 그런 다음 관장님과 예의를 갖추고 인사하려는데, 관장님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시더니 “잠시만”이라고 손에 글을 적어 주셨다. 수련이 너무 힘들었던 나는 얼른 꿇었던 무릎을 풀고 검도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데 내게 다가오신 관장님은 손에 무언가를 들고 계셨다. 뭔지도 모르지만 관장님이 일어서 계셨기에 나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관장님은 나와 마주보고 서서 목례를 하며 인사를 하셨다. 나도 얼떨결에 따라 관장님께 인사했다. 그리고 내게 다가오신 관장님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 무엇인지 알려주시면서 내 손에 글을 적어주셨다.

“급증. 5급. 위 사람에게 대한검도회 심사규정에 의거하여 이 증을 수여함.”

솔직히 첫 번째 심사를 통과했다는 결과에 대한 기쁨보다 관장님이 직접 급증에 적힌 내용을 손에 적어주신 게 더 크게 와닿았고 감동이었다.

보통 상이나 무슨 증과 같은 걸 누군가에게 수여할 때, 해당 내용을 읽은 후 수여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상이나 증을 받는 사람이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으면 그 내용을 수여하는 사람이 읽을 때 속기사나 수어통역사가 통역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그냥 건네주기도 한다. 듣지 못해도 대략 무슨 내용인지 짐작할 수도 있고, 그런 절차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앞서 소개했던 사례에서처럼 어떤 경우는 아예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기도 한다.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관장님의 진정성 있는 수여식이 더욱 감동적이었던 것이다. 급증에 적힌 몇 글자 안 되는 내용이라도 한 글자씩 손바닥에 글로 적어주며 제자에 대한 관심과 정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글로 적고 나면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별 거 아니라고. 급증이든 상이든 해당 내용을 손에 적어주는 거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대한민국이 얼마나 보수적이고 형식적, 절차적인 부분만 강조하는 사회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급증이나 상을 받게 되면 그 ‘과정’보다는 ‘결과’를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어떻게 그 급증이나 상을 받게 되었는지보다 사진으로 남겨지는 그것을 받는 ‘순간’에 더 주목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시청각장애를 가지고 5개월 동안 검도 수련을 받으면서 어떻게 검도를 배우고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는지 하나씩 맞춰가는 과정들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제자만 고민하는 게 아니라 스승인 관장님도 함께 고민하고 대화와 연습을 통해 맞춰가는 시간, 즉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래서 급증을 수여할 때 관장님의 액션은 아주 자연스러웠지만, 그래서 내게는 더욱 감동적이고 고마운 순간이었다.

[더인디고 박관찬 기자 p306kc@naver.com]

시청각장애를 가지고 있고 대구대학에서 장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첼로를 연주하며 강연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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